역사포커스
아일랜드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운동
일제하 최대의 전 민족적 항쟁인 1919년 3·1운동 직후, 식민 본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식민학자 야나이하라 타타오矢內原忠雄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을 아일랜드에 비유한다. … 본국과 가까워서 경제적으로나 국방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 등 조선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지니는 지위를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하여 지니는 지위에 비유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근거하여 아일랜드와 조선의 관계를 설명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 3·1운동 직후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사실상 3·1운동은 일본 군부가 주도한 조선 식민 지배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일제는 무력으로 식민지의 저항을 강제 진압하였으나, 1910년대와 같은 무단통치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 육군은 무단통치 방침을 부분적으로 고쳐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지만 일본 내 번벌 특권 세력의 약화, 정당정치 세력의 성장, 민주주의의 시대사조화, 식민지에서 정우회正友會 세력을 확장하려는 하라 내각原内閣의 움직임, 3·1운동 발발에 대한 육군의 책임론 등과 맞물려 더이상 지배정책으로 관철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어떻게 식민 지배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부 일본 자유주의 지식인, 정당 정치가, 식민정책학자는 조선에서의 자치제 실시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서구 제국의 식민 정책에 대한 탐구가 다시 일어나면서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가 큰 관심을 받았다. 아일랜드는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저항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영국의 다양한 식민 지배 정책에 대응하여 자치제와 참정권제 등이 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 권력 핵심부, 즉 특권 세력과 군부 세력, 정우회 핵심 세력은 자치제와 참정권제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이런 정책들이 식민지 지배의 안정보다는 일본 제국의 이해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