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학계에 의하면 염제는 중화문명을 시작하고, 황제는 중국 제왕의 시작이며, 요임금은 중화문명의 핵심을 형성하고, 우임금은 하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 재단 연구팀은 위의 신화상 인물들이 고고 유적과 결합되어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해왔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중국의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살았다는 허난성 정저우시(鄭州市)의 다허춘(大河村) 유적 생활 모습(다허춘유적박물관, 필자 촬영)
허무주의 출현과 염황열(炎黃熱)
중국에서 허무주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다. 문화대혁명 시기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혁명의 이상은 1978년 개혁개방과 함께 사라졌다. 1980년대 중국인들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휩싸였다. 이와 같은 사상의 공백기에 서구 자본주의와 함께 민주주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그 결과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발명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애국주의로 역사 허무주의와 민족 허무주의 사조를 비판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황제는 신화적 인물이기도 하고,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가지 허무주의 사조를 비판하는 데 적합했다.
1991년 4월 베이징에서는 중화염황문화연구회中華炎黃文化硏究會가 성립되었는데 이에 참여한 저우구청周谷城, 샤오커蕭克, 페이샤오퉁費孝通, 청쓰위안程思遠은 국가급 정치가이거나 관방의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들이었다. 199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염제와 황제 붐’을 ‘염황열’이라 하는데,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황제를 중화민족의 첫 번째 제왕으로 정립하여 위대한 고대사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를 신화화하여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 허무주의 비판과 황제의 역사화
역사 허무주의는 ‘중국의 위대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황제의 역할은 위대한 고대사를 ‘발명’하는 것이었다. 황제를 역사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고문헌 상 황제 관련 기록을 고고 유적에 대입하여 황제의 생존 시기를 규명하면 된다. 사료에 등장하는 황제의 출생지, 활동 지역, 매장 지역 등은 모두 황제의 실존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연구자들은 춘추전국 시대 황제 관련 기록을 신석기 유적에 대입하였는데, 이들 사이의 수 천 년 역사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문헌 기록 중 고고 유적과 유물에 부합하는 내용만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하였으나 이 또한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지역적으로 볼 때 황제 관련 고고 유적은 중국 전역에서 발견된다. 1940년대 서북설 이후 허난설河南說, 줘루설涿鹿說, 산둥설山東說, 내몽골설, 후난 후베이설湖南湖北說이 제기되었고, 중국 내 신석기 유적이 발견된 곳은 모두 황제의 활동지가 되었다. 중원의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동북의 훙산 문화紅山文化, 서북의 치자 문화齊家文化, 산둥의 룽산 문화龍山文化는 황제족의 문화가 되었고, 심지어 황제와 초나라의 곰 토템을 연계하여 후난과 후베이가 황제의 발상지라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결국, 남부를 제외한 중국 각지가 황제의 발상지가 되고 활동지가 되었다.
시기적으로 황제와 관련된 가장 이른 유적은 신석기 초기 페리강 문화裴李崗文化(기원전 5500~기원전 4900)이며, 가장 늦은 유적은 룽산 문화(기원전 2500년~기원전 2000년)이다. 현재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황제가 생존했던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무려 3,000년이나 차이가 난다. 결국 황제는 너무 많은 지역에, 너무 긴 시간 동안 존재하여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 학계의 지나친 황제열로 오히려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황하 변의 염제와 황제의 조상 (필자 촬영)
민족 허무주의 비판과 황제의 신화화
민족 허무주의는 중화민족과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황제의 역할은 전 세계 중화민족을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갖는 공통의 기억인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 강화의 관건은 공통의 조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이 다른 성원이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데 추상적 신념을 제공한다.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민족이라 지칭되는 새로운 군체가 황제를 공통의 조상으로 믿게 하려 하였다.
영웅의 상징화, 기념물 제작, 영웅을 위한 의례 등 기억행위remembering로 불리는 다양한 실천이 없다면 기억은 기억일 수 없다. 중국 정부는 허난성 정저우시鄭州市에 염황거상炎黄巨塑, 신정시新鄭市에 황제고리黃帝故里, 링바오시靈寶市에 황제주정원黃帝鑄鼎原, 산시성山西省에 황제릉 등 각종 기념물을 건립하였다. 황제가 태어난 황제고리와 황제 무덤이 있는 황제릉에는 배조광장拜祖廣場, 중화성씨광장中華姓氏廣場, 기복수祈福樹, 성씨수姓氏樹를 조성하였다. 배조대전과 헌원전은 황제에 대한 대규모 제사를 거행하는 제장이며, 중화성씨광장과 성씨수는 황제가 ‘중화의 뿌리中華之根’임을 강조하는 기념물이다.
필자가 2017년 황제고리를 찾았을 때 정치 슬로건은 ‘평화, 화목, 조화和平, 和睦, 和諧’로, ‘조화사회’는 후진타오 정부의 핵심 슬로건이었다. 2018년에 황제릉을 찾았을 때는 ‘최초의 조상을 회고하며 신시대의 꿈을 구축한다緬懷初祖, 築夢新時代’고 하며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을 선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2017년과 2018년의 차이인지, 지역적 차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곳 모두 정치 선전의 중요한 장소임은 틀림없다.
절반의 성공
황하 변에 염화거상이 세워질 때 중국 소수민족들은 우리는 ‘중화민족이기는 하지만 염황의 후손은 아니다’라고 반발하였다. 결국, 중국 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줘루현涿鹿縣에 황제, 염제, 치우를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모시는 중화삼조당中华三祖堂을 건립하였다. 현재 황제는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역사적 실존도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황제를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만들어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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