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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새 책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문화와 사상 자주적이고 기백 넘치는 고구려 사회와 문화
  • 전략기획실 연구위원 금경숙·김일권

동북아역사재단은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이어 우리 학계의 고구려 연구를 집성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와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을 동시에 펴냈다. 이 책은 동북공정과 중국학계의 논리에 대한 대응방안과 방향을 모색하는 우리 학계의 논리를 정리하고, 국내외 고구려 연구자들에게도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알리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을 포함한 34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또한 이 책자는 국내에서 고구려 문화사를 단행본 형태로 처음 발간한 것으로 고구려사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나 학생들도 알고 싶어 하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종합교과서 내지 교양서라고 할 만하다.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고구려사 전체를 ▲고구려의 기원과 국가 형성, ▲고구려의 성장, ▲체제의 정비와 영역확대,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 구축, ▲고구려의 멸망과 계승 등 5부로 나누고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도 독자적인 체제를 마련한 고구려의 자주적 면모를 부각시켜 중국의 논리를 반박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이 책에서는 고구려 족속(族屬)계통에 대해서 최근 중국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 집단은 본래 예족(예족, `예맥족)의 일부를 구성하였으며, '예족'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그리고 예족으로부터 분화하여 처음에 구려(句麗)로 불리다가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맥(貊)'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점차 확산되어 맥족의 나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주민은 기원전 3세기~2세기에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무덤 양식인 적석묘를 조영(造營)하면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적석묘의 문화권은 고구려 초기의 공간 범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고구려 건국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건국기에 부여계 유이민 세력이 적석묘를 채용하여 토착사회와 융합한데서 적석묘 축조와 더불어 형성된 문화적 토대는 강력한 융합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율령은 고구려가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독자적인 체계를 마련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율령을 반포하기 위해서는 유교사상의 이해가 있어야 함은 물론 일원적 법체계로 영역을 지배할 수 있는 '집권력'이 성립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고구려의 율령은 형벌 적용이 엄격하고 유교의 농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이는 전통 관습법을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결과다.

이와 함께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5세기 이래 다원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그에 따라 주변 여러 나라를 정복해 가는 중국 세력의 구심력과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려는 고구려 사이의 충돌 결과로 서술, 통일전쟁이라는 중국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 고려 등과의 관계와 관련, 조인성 경희대 교수는 "1123년 고려를 다녀간 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 개국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 '건국시봉(建國始封)'조에서 고구려, 발해,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 고려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과거에는 발해,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이 있었고, 당시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 이 책에서는 ▲제의 체계 정비와 왕실 계보 일원화 ▲역사서 『유기(留記)』 100권 편찬, ▲'태왕', '호태왕' 등 왕에 대한 칭호의 격상 ▲독자적인 연호(대표적으로 '영락')사용 등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주 국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구려에 대해 '무'를 숭상하는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만이 아니라 '문', 즉 문화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나라였다.

제1부에서는 고구려의 종교와 사상을 신화, 풍속, 도교, 불교, 유교 측면에서 알기쉽게 이해하도록 서술하였으며, 제2부에서는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를 경제, 의식주 생활, 언어와 문학, 미술과 공예, 음악과 무용, 천문학과 자연관, 대외문화교류 분야로 나누어 풀이하였다. 제3부에서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도성과 성곽, 고분과 벽화, 토목기술, 토기와 와전, 무기와 무장, 금석문과 서체를 중심으로 서술하여 그 동안 축적된 고구려 고고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총망라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 문화가 지닌 고유성과 진취성, 개방성과 국제성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고구려 문화는 무엇보다 힘차고 기백이 넘쳤다. 고구려인들이 걷는 것을 뛰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허리띠를 매는 등 활동적인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씨름이나 수박희 같은 격투기를 연마하고, 사냥놀이를 즐기는 등 생활의 전반적인 태도에서 활력과 기백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웅장함에서 중국의 고대 유적을 능가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개토대왕릉비의 높이는 6.39m로 같은 시기 같은 양식의 비석 중 가장 크며, 전반기 수도 국내성에서 축조된 왕릉급 적석총의 규모가 천추총이 71m, 태왕릉이 63m, 서대묘가 62m 등 초대형이었다. 또 왕궁으로 추정되는 안학궁의 중궁 1궁전 앞면의 길이가 87m, 측면이 27m에 이르고 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인들은 매우 낙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사는 동안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노래와 춤을 즐겨, 남녀 귀천 할 것 없이 밤마다 모여 놀았으며 장례 때도 북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망자를 보냈다. 10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는 이러한 낙천적인 문화상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구려 문화와 사상』은 고분벽화 산성 등 고구려 유적 유물에 대한 부분적 접근이 이뤄진 1990년대 이후 촉발된 고구려 문화사에 대한 우리 학계의 15년간의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두 책을 통해 1500년 이전의 고대 국가가 이룩한 문화라고 일컫기에는 너무나 현대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우리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문화적 주체성과 개방성의 정신을 국내 최초로 발간된 이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 속에서 느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