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한국역사 학계의 키워드로 단연 "헤이그밀사사건"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올해가 이준열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헤이그밀사들의 애국충정을 기리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과 학술대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헤이그밀사사건은 "密使"라는 단어의 이미지와 이준열사의 "자결"문제가 중첩되어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를 양산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화를 역사로 옮기는 작업 역시 이 사건을 올바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될 것인 바, 여기서는 열강 특히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6년 10월 9일,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1907년 6월15일~10월 18일)가 개최되기 8개월 전, 주일러시아공사 바흐메찌예프는 일본 외상 하야시(林董)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헤이그평화회의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는 정확히 1년 전인 1905년 10월 9일 러시아정부가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에게 각서를 통해 헤이그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하기로 결정하였음을 통고한 것을 완전히 뒤집는 조치였다. 짜르 정부는 새롭게 소집하게 될 헤이그 평화회의에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대표를 나란히 초청함으로써, 한국의 신성불가침한 주권을 확인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던 기존 입장을 철회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석상에서 한국의 주권을 침해한 일본의 국제법위반 사실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던 고종의 특사들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한 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짜르 정부는 헤이그평화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한 기존의 방침을 번복하였는가?
왜 러시아는 한국 독립지지를 번복했을까?
이는 러시아의 대외정책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러시아가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를 준비하던 시기는 전통적인 외교노선을 포기하고 적대국이었던 영국 및 일본과의 협상체결을 추구한 신임 외상 이즈볼스키의 신노선 외교정책(New Course)이 추진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전통적 외교정책은 대륙동맹에 기초하여 해양세력의 대륙진출을 적극 차단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면 1906년 5월 외상에 취임한 이즈볼스키는 패전과 혁명의 위기 속에서 체제유지와 내부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적인 대외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 판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외교정책은 군사력에 기반 한 전통적인 팽창정책에서 탈피하여 협상과 타협을 통해 안정을 도모하는 이른바 "과거와의 단절"이 그 골간을 이루었다.
실용주의에 입각한 그의 외교혁명은 전통적인 적성국인 영국 및 교전국이었던 일본과의 타협과 협약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에 1907년 러·일협약과 영러협상의 체결 과정은 시기적으로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와 맞물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문제는 대일접근을 위한 러시아의 협상카드가 되었던 바, 일본의 반발을 의식한 러시아는 한국을 헤이그 평화회의 초청을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이즈볼스키의 정책은 주일러시아공사 재직 기간(1899~1902)에 고안된 한국문제 해법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그의 "일본경험"에서 체득한 한국문제 해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한국은 러·일간의 분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 때문에 러·일간의 일련의 협정들이 체결되었지만, 한반도에 대한 러·일 양국의 대등한 권리는 일본이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것이다. 둘째, 한국을 중립화 시키는 방안은 러·일간의 협상을 대체하는 대안일 수 있으며, 한국 역시 러·일간의 충돌위험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자위의 차원에서 이 같은 해법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반대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게도 불리할 수 있는 바, 한반도에서 러시아에 불리한 국제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궁극적으로 러·일전쟁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셋째, 러·일 양국이 만족하는 한국의 중립화를 실현시킬 유일한 방안은 러시아와 더불어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국에 정치적인 야심이 없고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호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냉혹한 국제 사회, 친구를 잃은 고종
요컨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자 유일한 담보가 된다는 것이 이즈볼스키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이미 1905년 7월 29일 미국이 태프트(W.Taft)-가쓰라(桂太郞)협정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 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한 전임외상 람즈도르프의 판단은 수정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 없었다.
이에 미국, 영국과 더불어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을 유지시키기 보다는 일본의 보호국화정책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열강은 약한국가(Weak State)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열강을 끌어들여 상호 대립시키는 소위 以夷制夷 정책뿐만 아니라 열강의 침탈경쟁을 부추김으로써 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없는 국가 때문에 문명 국가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공통된 견해였다. 따라서 44개국의 256명의 대표가 참석한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는 군축문제뿐만 아니라 국제분쟁을 무력이 아닌 중재재판이라는 법적장치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그 본연의 목적이 있었다.
짜르 정부는 동아시아에서 러·일협약, 유럽에서 영·러협상을 체결함으로써 아시아와 유럽에서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유럽에서 3국 협상체제를 구축하여 3국동맹과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써 평화를 담보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몽골 한국을 교환하는 세력권 분할을 통해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즈볼스키가 추구한 러시아·영국·프랑스·일본의 4국 협상체제가 3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진영과의 대립을 격화시킴으로써 전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간 단초가 되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1907년 1월 11일 주한러시아총영사 플란손은 기울어져 가는 한국의 운명과 이를 막기 위해 몸부림친 고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고종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는 그를 신뢰하는 열강에게 역부족으로 보이는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일 밖에 없다. 고종이 과거의 친구들을 잃어버렸을 때, 일본은 세계여론의 공감을 얻는데 성공했고 고종은 혼자서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 투쟁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군주로서의 주목할 만한 성품을 지닌 그는 역사에서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고종은 흔들리지 않는 끈기를 지닌 의지의 인물로서 매우 드문 사례이며 인민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풍상을 다 겪었고 의기소침해 질 수 있는 사건들을 잘 견뎌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