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은 《사기》 〈굴원가생열전〉에서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 시인 굴원(屈原)이 죽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돌을 품고 스스로 가라앉아 죽었다."
여기서 '돌을 품고 스스로 가라앉다'로 풀이하는 '회석자침(懷石自沈)'이란 네 글자가 나왔다. 이 대목은 훗날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사마천과 굴원 사이에는 약 200년 가까이 시차가 있다(굴원은 기원전 343년 경,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마천이란 역사가가 굴원이 죽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으니 진실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죽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심지어 굴원과 관련 있는 유적이나 기념물의 기록화 따위에도 굴원은 절벽이나 돌 위에서 멱라수를 향해 뛰어들어 죽는 것으로 그려질 정도다. 그러나 굴원의 일대기를 가장 상세히 남긴 사마천은 그의 죽음을 위와 같이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사실'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찾아서
이 묘사에 관한 후대 역사가나 학자들의 비판은 대체로 한 방향으로 모아진다. 속된 말로 "네가 굴원이 죽는 것을 직접 봤냐?" 는 것이다. 어디에도 굴원이 어떻게 죽었는지 소상하게 나와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사마천은 무엇을 근거로 굴원이 돌을 품고 스스로 걸어 들어가 가라앉아 죽었다고 하느냐, 상상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문이자 비판이다.
사마천 역시 이 지점에서 고뇌했을 것이다.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죽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마천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굴원이 어떻게 죽었느냐에 있었다. 굴원은 망해가는 조국 초나라를 어떻게든 붙들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어리석은 군주와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배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정에서 내쫓기는 굴욕이었다.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굴원은 자결을 선택했다. 이 자결은 도피나 자포자기가 결코 아니었다. 강력한 저항이었다. 사마천은 굴원의 이 정신을 놓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자결했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사실과 진실의 경계 지점에서 사마천은 고심했다. 굴원의 인품을 다시 확인했고, 굴원의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굴원의 사당과 무덤, 멱라수까지 직접 찾았다. 또 굴원 고향 사람들을 탐문했다. 그 결과 사마천은 굴원의 죽음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었다. 굴원의 성품과 기질을 그의 작품과 현장, 그리고 모든 기록들을 통해 재구성했다. 사마천은 나약한 '객관' 뒤로 숨지 않고 확고한 '주관'으로 형체뿐인 '사실'을 극복하여 정확한 '진실'에 다가선 것이다. 이야말로 그가 오늘날 나약한 객관과 허망한 사실 뒤에 숨어 진실을 가리는데 급급한 역사가들에게 던지는 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통사의 전형이자 모범인 《사기》와 〈조선열전〉
《사기》는 동양 역사서의 모범이다. 사마천이 창안한 역사 서술체제인 기전체는 중국은 물론 동양 한자 문화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우리 역사서들은 직접 영향을 받았다(《삼국사기》와 《고려사》가 기전체로 쓰인 대표적 작품). 2천 년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를 뛰어넘는 역사 서술체제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닐 만큼, 《사기》는 통사의 전형이자 모범이다. 문제는 역사가 사마천의 정신은 그의 출현 이후로 퇴보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사마천의 진가는 더욱 빛난다.
《사기》는 우리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30권 중에 한국 고대사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조선열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선열전〉은 존재만 인정받았을 뿐 사료로서 가치와 중요성, 진실성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중화주의로 분칠된 왜곡된 엉터리 기록이라는 평가도 부지기수다. 더욱이 이 기록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일제 식민사학에서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고의로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조선열전〉은 고조선 멸망 과정을 기록한, 상대적으로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한사군 문제를 비롯해 여러 쟁점들이 기록 아래 잠겨 있고, 온갖 논쟁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의 신빙성부터 진실성 문제까지 우선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 《사기》 기록에 따르면 내분으로 망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 멸망 연도인 기원전 108년이다. 그 해는 사마천이 38세 때로, 〈조선열전〉은 사마천이 살아 있을 당시 기록한 당대사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금석문에 비해서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1차 사료인 것이다.
그 해는 또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담의 뒤를 이어 한나라의 기록을 책임지는 태사령에 취임한 해이기도 했다. 〈조선열전〉은 고조선 정벌에 종군했던 기록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인 1차 사료다. 《사기》 전체 기록을 신뢰하는 한 〈조선열전〉의 사료로서 신뢰성은 따질 것이 없다. 여기에 사마천이 보여준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치열한 사가의 자세를 생각한다면 〈조선열전〉에 대한 시각교정이 필요하다. 《사기》와 사마천을 중국이 전략 차원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학계의 무관심은 무책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