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누르하치, 갑옷 열세 벌로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우다
  • 홍순도 (아시아투데이 베이징 특파원)

지금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여진족은 청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나라 없는 민족이었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았다. 17세기 초반 무렵 겨우 15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조선을 아버지 나라처럼 섬겼다면 더 이상 설명은 사족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민족이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최대 제국 청나라를 건국했다.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은 한민족과 관계도 밀접하다. 심지어 같은 민족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설도 있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 가문의 성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 누르하치 가문이 고려 왕씨 후손이라는 주장까지 한 것을 보면 진짜 한민족과 상당히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조선을 몹시 괴롭혔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만 상기해도 좋다.

이처럼 세계사에서도 드문 기적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한민족에게도 치욕을 안겨준 이 청나라를 건국한 주역은 바로 애신각라 누르하치(1559~1626)라는 인물이다. 중국사에서는 청 태조로 부른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대 제국을 창업할 싹수가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여진족 여러 부족 중에서도 비교적 약한 건주여진 출신이었다. 할아버지인 교창가(覺昌安)와 아버지 타쿠시(塔克世)가 명나라 장군 이성량(李成梁)에게 충성을 바쳐 부족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대제국 건국은 고사하고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미한 건주여진 비주류에서 대칸에 오르다

실제로도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성량의 명령으로 같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앞장서는 등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으나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이용가치가 다했다고 본 명나라 군대에 피살당한 것이다. 이때 이성량 집에 볼모로 잡혀 있던 누르하치는 울분을 삼켜야 했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받은 갑옷 열 세벌로 군대를 일으킨 다음, 1589년 나이 서른에 드디어 건주여진을 통일하는 업적을 일군 것이다. 이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주변 여진족들도 하나씩 복속시키면서 대칸(大汗)에 오르는 발판을 마련했다.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킨 데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도 병합했다. 사실상 여진족을 통일한 1616년 드디어 나라를 개창했다. 이때 붙인 국호는 후금이었다. 여진족이라는 민족 이름도 만주족으로 바꿨다.

이후 그는 드디어 숨겨놓았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생 원수로 생각한 명나라 공격에 나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저 유명한 칠대한(七大恨, 누르하치가 1618년 반포한 조칙_편집자 주)을 하늘에 고하고 공개적으로 명나라에 선전포고도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해도 좋을지 몰랐으나 현실은 달랐다. 일방적으로 명나라를 공략, 대제국을 건국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621년에는 요동을 공략, 산해관(山海關) 이북을 완전 장악했다. 이제 베이징(北京)으로 입성, 명나라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일만 남은 듯 보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그는 1626년 2월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성을 공격하다 입은 부상으로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618년 명나라 군대와 전투를 시작한 이후 처음 당하는 패배에서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업은 아들 홍타이지(皇太極)를 거쳐 손자 순치제 때 이뤄졌다. 1644년에 베이징에서 만주족의 나라 청을 세운 것이다. 갑옷 열세 벌로 거병했으니 '성경'이나 '장자(莊子)'에 나오는 "그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했다."는 말이 딱 들어맞은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최정예 팔기군과 외교 능력으로 기적을 일구다

기적을 일군 주역인 만큼 그가 이룩한 업적은 많다. 우선 여진족과 대륙의 동북지방을 통일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만주족이라는 민족 공동체 형성으로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길을 열었다는 것 역시 지나치면 곤란하다.

여진족의 사냥 조직에 불과했던 팔기 제도를 사회 제도로 정착시킨 것은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를 통해 군제를 재정비해 '팔기군'이라는 막강한 기병대를 창건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여진족 군대를 백전백승 정예병으로 키울 수 있었다. 영원성 전투에서 패할 때까지 그의 군대가 승리 밖에 몰랐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단순히 전투에만 뛰어난 무장 군주는 아니었다. 만주어를 창제하는 문화 능력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사회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를 통해 노예제 전장(田莊)을 봉건제 전장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또 유목 경제를 농경 경제로 전환하는 기틀도 마련했다.

탁월한 외교 전략을 구사한 것 역시 인정해줘야 한다. 이는 그가 기회가 올 때까지 납작 엎드려 굴종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나, 명나라를 견제하고 조선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제안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비난받을 점도 없지 않다. 우선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많은 살생을 저지른 것을 꼽을 수 있다. 포로로 잡은 명나라 병사들을 산 채로 파묻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중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이를 본보기로 따라 했다는 설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살육을 자행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외에 장자 상속과 황세자 사전 책봉 원칙을 훼손, 이후 청나라 조정을 황제 보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무대로 만들어버린 것도 결과적으로 그가 한 잘못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작 열두 척 배로 왜군의 대 전단을 궤멸시킨 이순신처럼 갑옷 열세 벌로 인류 역사상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에게 붙는 제2의 칭기즈칸이라는 찬사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