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마다 고유의 질감이 있다. 끝나지 않는 시간의 질감을 느낄 수 있는 고도(古都) 둘을 들라면 베이징(北京)과 시안(西安), 그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택하겠다. 베이징은 이미 해를 가리는 높은 건물과 대로를 가득 채운 차량 때문에 과거의 문으로 들어가자면 한참 숨을 골라야 하지만 시안은 여전히 골목마다 과거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저 걷기만 해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주(周), 진(秦), 한(漢)에서 수(隋)와 당(唐)까지 무려 열 세 왕조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들이 베이징을 닦고 넓히기 전에는 중원에서 가장 우뚝한 도시였다.
왕조를 세우기에 좋았고 문명에 개방적이었던 땅
중국 대륙을 통치한 왕조의 입장에서 이 땅은 참으로 힘을 모으고 펼치기 좋은 장소였다. 북(北)으로 황토 언덕이 우뚝우뚝 천연의 성채를 만들고, 남(南)은 진령(秦嶺)의 녹음 짙은 고봉이 휘돌아 감싸고, 서(西)의 농산(隴山)과 동(東)의 화산(華山)이 관문이 된 이 땅을 예부터 관중(關中)이라 불렀다. 사방이 천연의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네 관만 막으면 새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금성탕지(金城湯池)라는 예칭을 얻었다. 거기에 동서로 천리나 뻗은 위수(渭水) 평원의 생산력은 막대하여 반파(半坡) 구석기인들조차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인들이 화하(華夏)의 본향으로 관중과 그 중심인 시안을 꼽는 것도 틀리지 않다. 까마득한 선조들이 만든 기반 위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산동 6국의 문화를 모아 체제를 만들었으며 한이 이를 이어받아 반석에 올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야를 유라시아로 확대하면 관중의 네 관문은 문명에 한없이 개방적이어서 동서남북이 마음대로 침투하는 열린 문이었다. 사실 까마득한 옛날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혼자 선 문명은 없었다. 반파인들의 채도(彩陶)에서 이미 저 멀리 이란이나 메소포타미아와의 교류 흔적이 나타난다.
7,000년 전부터 유라시아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교류의 동방 거점에 시안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류의 씨앗이 커져 실크로드로 발전하고 지금은 하늘과 땅의 길이 종횡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안을 여행할 때는 역사와 소통을 결합하여 주제를 잡아도 1주일은 바쁘게 보낼 수 있다. 예컨대 구석기 교류사를 염두에 두고 반파 유적지를 돌아본다면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기는 어렵고 이란도 너무 멀리 있으니, 채도 도안집만 하나 들고 박물관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교류와 자생과 융합과 창조 과정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박물관을 나서면 도시 서쪽의 진(秦) 아방궁 유적을 한 번 보고 시내 역사박물관을 들른 후,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나가 황릉의 병마용을 둘러보길 바란다. 진은 북방 및 서방계 민족들과 싸우면서 성장했지만 그들과 얼마나 문화적으로 많이 교류했는지. 부리 달린 네 발 짐승의 모티브는 초원을 건너 시베리아, 저 멀리 서쪽의 그리스까지 여실히 확인된다.
한으로 넘어오면 장안성 유적을 찾아가 그 규모에 한번 놀라 보시라.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명대에 만들고 청대에 보완한 것으로 당시의 미니어처 모형에 불과하다. 한대의 장안성은 서방에서 오는 물품들의 최대 소비처였기에 모험가들은 사막을 건너 길을 개척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단이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건너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로 들어갔고, 포도니 호두니 하는 식물과 호마, 사자 따위의 동물까지 서방의 진귀한 물품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물품뿐만 아니라 온갖 사상들까지 옮겨 다녔으니 중국의 행정 체제가 사막의 대상 도시로 들어가고, 불교나 조로아스터교 등이 실크로드를 건너와 시안에 모인 후 다시 동방으로 퍼져나갔다. 낙양이 도읍이 된 동한 시절에도 실크로드의 출발점은 여전히 시안이었기 때문이다.
서역과의 교류로 국제도시가 된 시안
시간을 건너 당대로 들어오면 이제 시안은 명실공히 국제도시가 된다. 서역 사람들이 들어와 장사를 하고 아예 그 땅의 무희들이 장안의 명문가 자제들을 사로잡았다. 이백은 흥청대는 시안 서쪽의 풍광을 <소년행(少年行)>이라는 시로 묘사했다.
오릉의 젊은이들이 금시의 동쪽에서(五陵少年金市東)
백마에 은 안장 올리고 봄바람을 가르네(銀鞍白馬度春風)
떨어진 꽃잎 밟아가며 어디 가나 했더니(落花踏盡遊何處)
웃으며 호희네 술집으로 들어가네(笑入胡姬酒肆中)
호희란 서역에서 온 춤추는 여자 혹은 술 따르는 여자이니 당시 장안은 얼마나 흥청거렸을까. 그러나 실크로드로 들어온 것이 어디 춤추는 여자만이었겠는가. 이 길을 따라 뭇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사로잡은 사상, 그중에 불교가 들어왔다. 황실마저 이 종교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니 드디어 현장의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시안을 여행할 때 대자은사에 들러 현장의 행장을 읽으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막과 설산 건너기를 주저하지 않던 치열했던 한 인간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친구가 한 명 있다. 동쪽에서 태어났지만 어쩌다 현장을 따라 인도로 들어간 원숭이 영웅, 손오공이다. 손오공은 정말 서쪽으로 간 것일까? 《서유기》의 손오공은 물론 서쪽으로 갔다. 그러나 현실의 손오공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으니 인도에서 불리던 이름은 원숭이 왕 하누만이다. 손오공, 아니 하누만이 어찌 혼자 왔으랴. 인도의 복잡하고 방대한 서사 체계를 동쪽으로 가져왔다. 당대 장안 사람들은 더 이상 중국 중심의 세계에 살지 않았다. 북쪽의 유목 제국, 동쪽의 페르시아와 비잔틴, 그리고 남방의 천축까지 연결된 세계의 중심이 장안이라고 생각했으니 지극히 중국적이면서, 중국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곳, 바로 수천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지층, 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