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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개화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 김종학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한말 개화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는 필자의 동명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개화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밀결사의 결성 배경과 목적, 외국인과의 은밀한 교섭과 권력을 향한 암투를 추적하고, 그 맥락에서 갑신정변(1884)의 경위를 새로 조명한다. 이 책은 조선을 비롯한 영국·일본·중국·미국·프랑스의 미간 외교문서에 기초해 개화당의 기원과 행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연구로서 의미를 갖는다. 특히 기무처절목(機務處節目)이나 정상각오랑자기연보(井上角五郞自記年譜)등 이 책에서 처음 소개되는 문헌들은 비단 개화당뿐만 아니라 향후 근대사 연구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열강의 미간 외교문서로 밝힌 개화당의 정체

이 책의 요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권 장악과 조선의 근본적 개혁을 도모한 혁명비밀결사 또는 역모집단이었다는 것, 또한 그것은 신미양요(1871)를 전후해 오경석과 유홍기가 김옥균을 포섭하면서 처음 결성되었으며 따라서 그 사상적 기원 또한 의역중인(醫譯中人)의 철저한 현실 비판과 과격한 사회변혁사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화중심적 사관(開化中心的史觀)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개화당의 계보를 다시 그리고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근대사 담론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일반적으로 개화파는 박규수의 문하에서 형성되었으며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청()의 간섭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문제 의식,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대한 견해 차로 말미암아 온건파와 급진파(개화당)로 분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개화당은 이미 그 10년 전부터 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개화파가 분열된 계기가 아니라, 이미 암약하고 있던 개화당이 고종에 의해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기존 정치 세력과 외교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시작하게 된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박규수의 사상은 고종의 친정 직후 대일 관계의 개선 및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문호개방과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한 민씨 척족 및 김윤식·김홍집·어윤중 등 신진 관료들의 등장과 관련된 한에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들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국제 정세에 순응해서 기존의 권력 구조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에 반해 개화당은 외세를 등에 업고서라도 그것을 전복하려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일견 유사한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양자는 본질적으로 정적(政敵)의 관계에 있었다.


셋째, ‘개화당1880년과 1881년 사이 일본의 언론과 외무당국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개화당의 영수 김옥균조차 개화라는 말을 운위한 것은 18845월 일본에서 귀국한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차관 교섭에 실패한 후 일본 현지에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및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와 갑신정변을 공모한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개화당이라는 명칭은 이 비밀결사의 본질을 거의 반영하지 못한다. ‘개화당이기 때문에 일본식의 문명개화를 추구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오해로서 무의미한 동어반복(tautology)에 지나지 않는다.

 

한말 개화의 의미와 우리 근현대사의 아포리아

1960년대 중반 이후 우리 학계에서는 역사학과 사회학 분야를 중심으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이 탐구되기 시작했다. 이와 궤를 같이 하여 지성사적 측면에서도 내재적으로 근대지향성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려는 연구가 축적되었으며 그 결과 실학과 개화사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가 일종의 정설(orthodoxy)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실학과 개화사상을 모두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실학은 그 근대지향성이 과도하게 강조되었고, 개화사상은 실학이 개항기의 국내외적 환경에 조응해서 변용한 결과라는 것 외엔 독자적인 사상 체계로서의 의미를 거의 잃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이 담론은 원래 그것이 극복하고자 했던 식민사관과 일정한 구조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자 모두 역사를 국가 중심의 목적론(teleology)으로 해석하며, 이에 따라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과제는 국가 독립과 부국강병이고 그 유일한 수단은 개화에 있었다는 확고한 전제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단순히 개화가 일제(日製)가 아니라 실은 국산(國産)이었다고 강변하는 것만으로는, 일본이 조일수호조규를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국시켰고 청일전쟁으로 비로소 조선을 독립시켜주었다는 식의 근대 일본이 만들어 놓은 역사인식 틀을 완전히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역사담론 속에서 김옥균과 개화당은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위해 헌신한 민족의 선각자로 추앙받아 왔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모든 사상과 행동은 조선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외부의 힘을 빌려 구체제를 타파하는 것뿐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개화당의 근대적 언설 뒤에 감춰진 정략과 음모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개화를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친일 문제부터 해방 이후 건국 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근현대사의 아포리아(aporia)의 많은 부분이 바로 한말 개화의 문제에서 연유하며, 그 탈출의 실마리 또한 당시의 정치 현실과 개화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