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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역사도시 이야기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 교토
  •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학과 교수)

메이지유신은 기존의 일본 도시에 큰 변동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중심 에도(江戸)를 비롯한 각 지역의 조카마치(城下町)는 물론이고, 경제적 중심 오사카(大阪)를 시작으로 각지의 항구나 역참도 타격을 받으며 각기 큰 변환을 강요받게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794년 이래 천년 이상 전통도시로서의 권위를 이어온 교토(京都)가 받은 충격은 심각하였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 교토교토의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이전의 교토는 전통적 권위를 상징하는 천황의 고쇼(御所)와 현실적 권력을 상징하는 쇼군의 니조죠(二条城), 그리고 유서 깊은 사원의 본산과 신사가 다수 집중된 곳이었다. 물론 정치의 중심이 에도로 넘어갔기에 가장 번창한 도시는 에도였지만 천황이라는 전통적 권위가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교토는 쇼군의 시대임에도 여전히 가미가타(上方)’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페리 내항 이후 교토에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마침내 막부를 폐지하고 천황의 정치를 선언하는 왕정복고 대호령이 발포되었을 때, 교토인들은 교토가 새 정부의 명실상부한 정치적 중심지가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메이지 천황은 18693월 다시 도쿄로 향한 이후 교토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써 교토는 천년 이상 지켜오던 제도(帝都)’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폐도(廢都)’가 되어버린 교토의 활기를 회복하기 위해 교토부와 지역 상공인들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박람회였다. 그 시작은 18711010~1111일까지 한 달 동안 니시본간지(西本願寺)에서 개최된 교토박람회였다. 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박람회라 일컬어지는 1877년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보다도 6년이나 앞서 개최된 박람회라는 명칭을 내건 실질적인 일본 최초의 박람회였다. 만여 명 이상의 관람객에 고무된 주최 측은 교토박람회사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후 1872년 제1회를 시작으로 1885년까지 매년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제1회를 제외한 모든 박람회의 장소가 고쇼라는 점이다. 대대로 천황이 거주했지만 이제는 떠나버린 고쇼가 박람회장이나 동물원이 된 것이다. 교토의 메이지유신은 천황이라는 전통적 권위의 부재가 문명개화라는 새로운 권위로 대체된 시공간이었다. 참고로 1885년 제14회 교토박람회 이후 1896년까지 매년 개최된 공진회나 전람회 등의 장소도 고쇼였다.

    

고도(古都) 교토의 등장

1877년 메이지 천황이 교토와 나라(奈良)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그동안 부정되었던 교토의 문화적 전통을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하급 귀족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최대 공로자 중 한 명인 이와쿠라 도모미였다. 그는 교토의 쇠락을 우려하며 교토 부흥의 열쇠를 문명개화가 아닌 전통의 재생에서 찾았다. 188110, 요양차 교토에 머물던 이와쿠라를 중심으로 교토의 명승 및 고적을 보존하기 위해 설립된 보승회(保勝會)는 그 시작이었다. 이후 1883년 이와쿠라가 세상을 떠나면서 보승회 활동은 교토부가 이어받았지만 기대만큼 활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에 궁내성 교토지청이 설치되고 신도가(神道家) 중심의 황전강구소(皇典講究所)가 설치되면서 서구화 정책 일변도를 비판하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전통 보존을 통한 교토 부흥의 정점은 1895년 헤이안 천도 1100년 기념제였다. 한편으로는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이안 천도를 실시한 간무천황을 모시는 헤이안신궁이 창설되었다. 헤이안신궁의 본전이 전통적인 신사 형식의 건축이 아니라 헤이안교(平安京) 대극전(大極殿)을 재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헤이안 천도 1100년 기념제는 문명개화라는 새로운 권위를 전제로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전통을 찾으려는 교토 부흥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 열도 전체가 들썩이던 와중에 실시되면서 교토는 메이지유신 이래 처음으로 전국으로부터 주목받는 전통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교토는 고대 문화의 나라나 무가 문화 중심의 가마쿠라(鎌倉)와 다른, 일본 고유의 국풍문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특화되어 갔다. 이로써 대륙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고유한 천황 중심의 귀족문화를 구현했다고 여겨지는 고도(古都)’가 된 것이다. 그리고 1896년 이후 고쇼는 더 이상 박람회 장소로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1914년 다이쇼 천황 즉위식의 장소로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토는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 중심으로 전통을 재해석한 국체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1966년 고도보존법 제정과 교토

교토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공습을 받은 도쿄와 달리 전화(戰禍)를 면하였다. 하지만 고도의 경제 성장 속에서 전국적으로 택지 개발 붐이 일어나며 교토의 역사적 환경은 점차 황폐해졌다.

    

이런 가운데 1966년 교토, 나라, 가마쿠라를 고도(古都)’로 규정하는 이른바 고도보존법이 제정되었다. 그 취지는 과거 일본 역사 속에서 정치 및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의 문화적 자산을 보존함으로써 역사적 풍토를 유지하자는 것으로 현재 일본의 고도는 10곳이다. 이는 교토의 공간적 가치가 더 이상 국체의 공간으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전전(戰前) 그 장소가 아님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이제 교토는 일본 열도에 퍼져 있는 여러 역사 도시중 하나로 그 의미가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