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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염주성 발굴이 들려주는 발해의 역사
  • 김은국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한국고중세사연구소는 2018 7 17일부터 8 17일까지 연해주 핫산 지구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발해 염주성(鹽州城) 발굴을 성공리에 마쳤다. 필자가 총괄하고, 에브게니아 겔만(E.I.Gelman)이 이끄는 러시아 발해역사연구협회와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이에 금년 발굴의 성과와 염주성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살펴본다.


겔만 선생은 필자가 처음으로 염주성을 밟은 1992년 이후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러시아 내 대표적인 발해 고고학자다. 발굴장에 도착하면 겔만 박사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은 30년의 우정을 나누며 과거와 현재와 앞날을 전망한다. 이번 발굴은 염주성의 중심 건물 군 지역53구역에서 진행된 것으로, 작년에 노출시킨 건물 기단부에 대한 세부 조사와 함께 북쪽으로의 확장이 주목적이었기에 시작부터 큰 기대를 가졌다. 도착 첫날 야영장에서 발굴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개토제를 올린 후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발굴 시작 일주일 만에 우리 예상대로 건물지 3동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중심 건물 군을 확인하였다. 또 사흘 후에는 개원통보 출토와 토층 노출이 이어졌다. 아울러 20년 만에 사원지 연결 도로와 안쪽 성벽 축조 방식을 확인할 수 있어 폭염 속 단비와 같이 만세를 부르게 해 주었다. 이에 이번 발굴 성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 소개한다.



사원지 연결 도로와 성벽 쌓기의 진면목

염주성 발굴이 들려주는 발해의 역사51구역60㎡에서는 서쪽 성벽의 안쪽 도로를 심화 발굴하였다. 그 결과 기존 도로 아래로 새로운 도로를 발굴하였다. 51구역은 성벽에 인접한 사원지가 있는 곳으로 1980년대 러시아 측에서 처음으로 발굴을 시작한 곳이다. 사원지는 성 내 북서쪽 구릉지에 위치하면서 성의 북벽과 이웃하며, 석축 담장에 의해 거주 구역과 구분되어 있다. 금당지는 흙 기단 위에 축조하였다. 올해 발굴에서는 서문을 따라 사원지로 직접 연결되는 폭 4m의 도로를 확인하였다. 이 도로는 사원지와 거주 지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놓이기 전에 개설된 것으로 1980년 러시아 측의 사원지 발굴 이후 처음으로 밝혀지는 성과다.


특히 새로운 도로를 발굴하면서 기존 성벽 기초 부분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발해 염주성 성벽은 토심 석축으로 양측에 돌을 쌓고 그 안에 흙을 채우는 형식이다. 그런데 금년 새로운 도로 발굴을 통해 성벽 안쪽의 축조 상황이 처음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면석 아래로 지면을 잘 다진 후 모래흙과 판돌을 기단석처럼 깔고 그 위로 성돌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건물군을 통해 염주성 중심 구역 확인

53구역 염주성 중심 구역(270㎡)에서는 3동의 건물군(제27, 28, 29호 주거지)이 발견되었는데, 한꺼번에 건물 3동이 밀집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먼저 제27호 건물지의 전체 규모는 길이가 6.4m, 너비가 4.2m 정도이다. 제28호 주거지의 기초부는 10×5m 발굴 구역 내에서 길이가 6.5m, 너비가 4.1m의 범위를 지니고 있다. 벽체가 남아있고 그 안에 아궁이 부분과 고래가 남아 있는데,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확장 발굴이 필요하다. 또 제29호 주거지는 흙고래 흔적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주목할 것은 염주성 남문에서 이곳까지 주작대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작대로가 53구역 아래 기단으로 이어짐을 육안은 물론 드론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53구역의 건물지 3동이 염주성 북부에 위치한 중심 구역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국경 없는 우정으로 빚어낸 한·러 공동 발굴 성과 염주성 발굴이 들려주는 발해의 역사만세를 부른, 개원통보와 토층 노출

발굴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 48구역의 저장 구덩이를 조사하던 중 구덩이 바닥 쪽에서 개원통보(開元通寶) 화폐를 출토하였다. 이 화폐는 1998년 러시아 측의 염주성 성벽 첫 조사와 우물 출토 이후 20년 만에 다시 출토한 것이다. 발굴단원들은 출토 순간 만세를 불렀다. 지름 2.4cm, 무게 3.7g의 이 동전은 발해 염주성이 활발한 국제 교역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주는 척도다.


개원통보는 당나라 시기 621년에 처음 주조된 것으로, 발해 유적에서는 현재까지 발해 고분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동전 뒷면의 문양 등을 참조로 8세기 중반 경에 주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염주성 생활 주거지에서 출토한 개원통보는 그 형태로 보았을 때 발해 최대 도성인 상경성의 궁지 남쪽 담장 쪽에서 출토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698년 고왕 대조영(高王 大祚榮)이 발해 건국을 선포한 동모산(東牟山)에서도 개원통보가 출토되었음을 고려하면, 염주성의 개원통보는 그 활용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는 근거로서 검토 가능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48구역의 토층 전체의 노출인데, 이는 개원통보를 출토한 저장 구덩이를 중심으로 심화 발굴을 한 결과 드러났다.

 


염주성이 들려주는 발해와 고구려의 동해

염주성은 발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산하 4개 주()의 하나인 염주(鹽州)의 치소(治所). 중원은 물론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었던 성이다. 발해는 대외 교통로를 설치하였는데 그중 신라와 일본으로 가는 길이 염주성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1.38km이며 동, , 남쪽에 각각 옹성 구조를 지닌 성문이 있다. 재단은 2006년 출범 이후 올해까지 러시아와 공동으로 다양한 유물과 유구를 발굴하였다. 염주성은 발해의 표지 유적으로 발해의 역사와 문화 연구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성으로 자리하였다. 이제는 염주성이 고구려 시기에 동해로 나가는 출구였음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재단은 발굴종합보고서 출간과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통해 염주성의 발굴 성과와 함께, 발해의 역사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국내외에 천명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