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숙은 642년에 태어나 49세의 나이로 사망한 여인이다. 타고난 아름다운 용모에 재기발랄한 아가씨였던 그녀는 좋은 집안의 자제에게 시집을 가서 현모양처로 살았다. 남편과는 원앙처럼 금슬이 좋았고, 효심이 지극한 아들도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일생은 평범해 보인다. 요즘 나이로 치면 일찍 사망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은 곡절이 많은 여인이었다.
1975년 중국 랴오닝성(遼寜省) 차오양시(朝陽市)에서 당대(唐代)의 대형 무덤 하나가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묘지(墓誌)는 무덤 주인공이 고영숙임을 알려주었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이는 없었다. 어쩌면 평범한 일생 때문인지 아니면 거란인(契丹人)이라 여겼던 그녀의 출신 탓일 수 있지만, 귀중한 자료를 발견하고서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묘지(墓誌)는 죽은 이가 어떤 가문의 누구이며 생전에 어떤 일을 했고 언제 죽어 묻혔는가를 석판에 기재하여 무덤 안에 넣은 장례용품이다. 그래서 묘지의 첫머리에는 어디 사람이며 누구의 후손인가 하는 이른바 ‘출자(出自)’의 내용이 반드시 작성된다. 그녀를 거란인으로 여긴 것도 창려(昌黎) 고죽인(孤竹人)이라는 출신지의 정보가 단서였다. 그곳은 당(唐)에 귀부한 거란인들이 본관으로 삼곤 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문사로 유명한 한유(韓愈, 768~824)조차 ‘창려 한씨’라고 자칭했던 것을 보면 ‘거란인 설’은 잘못된 이해였다.
선대에 대한 기술은 출신지와 함께 그 가계(家系)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된다. 고영숙 묘지는 중국 전설상의 인물 인 오성(五聖) 즉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이 가계가 시작되어 고운(高雲, ?~409)이 연(燕)을 멸하여 집안이 승승장구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고운이라면 고구려 유민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 시절, 후연(後燕)을 무너뜨리고 대연(大燕)의 왕이 되었던 인물이다. 묘지는 고운을 언급하여 이 가계 가 누구의 후손인가를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고운의 인명이 출자 부분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고운의 두 글자 사이에 한 글자 정도의 공간이 비어 있어, 어떤 글자가 그 공간에 들어 있었을 것이라 여겼던 탓이다. 하지만 묘지의 탁본을 자세히 보면 네모 모양으로 도려낸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가계가 고운에서 비롯된 고구려계 유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 뒤에 등장하는 본번대수령(本蕃大首領)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까지 이해할 수 있다.
묘지는 고영숙의 부친에서 증조까지의 3대가 누구였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재하고 있다. 어떤 지위에 올랐는가를 기술한 부분을 ‘관력(官歷)’이라 하는데, 이 가운데 증조와 조부가 본번대수령이었다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본번’이란 중국에 들어와 있는 이민족 집단을 뜻하는데, 고운이 있음으로 해서 이 본번은 고구려 유민 집단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증조와 조부가 활약했던 시기는 그 관력에 각각 위(魏)와 수(隋)가 있음으로 보아 북위와 수대가 된다. 고운이 4세기 중엽 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 속에서 중국에 들어간 이의 후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영숙 일가는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고구려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영숙의 출신지인 창려는 당대 영주(營州)소속의 군이었다. 현재의 차오양은 그저 그런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당시 영주는 당이 랴오허강(遼河) 이서 지역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거점이자 전진기지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선비(鮮卑)모용씨(慕容氏)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전연을 세웠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전쟁에서 패하여 적국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6만 명에 이르렀을 만큼 요서 지역은 고구려사와 연고가 깊었다.
그러나 그 많던 고구려 유민들이 이후의 기록에서는 모습을 감추고 있어,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어 왔다. 그러던 고구려 유민이 영주를 연고로 하여 고구려 멸망 무렵까지 활동하고 있었음을 고영숙이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증조와 조부가 역임했던 본번대수령의 ‘대수령’은 당대 기록에 보이는 용어로 이민족 집단의 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대표적 관으로는 북위의 영민추장(領民酋長)이 있었는데, 이는 부족을 거느리고 있는 수장에게 부여한 관으로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이들은 북위의 도성 근처로 사민되어 부중을 이끌고 종군하는 동시에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증조 고회(高會)는 고구려 유민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이끌고 있던 우두머리였고, 그 까닭에 북위의 본번대수령에 제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위가 세습되었다는 것은 그 아들 역시 수의 본번대수령이었다는 사실로서 확인된다.
그동안 북위 등 북중국 왕조의 중심지였던 관중(關中)지 역에서는 고구려계 주민 집단이 조성한 조상기(造像記, 석상 등을 만든 유래를 적은 글)와 비(碑)가 확인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관중까지 들어갔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북주(北周)시대 활약한 고림(高琳)의 열전(列傳)을 통해 고구려 유민이 북위의 영민추장에 제수되 었던 사례는 확인되었지만 그 이상의 내용은 알 수가 없던 탓이다. 이제 고영숙의 가계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고구려 유민들이 북위의 영민추장으로 북조 정권에 참여하여 활동 공간을 확보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활약이 이들 가계가 이끌었던 유민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도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고영숙의 부친 고로(高路)가 역임한 관력에는 본번대수령이 보이질 않는다. 대신 행사주자사제군사(行師州刺史諸軍事)가 보이는데, 사주는 당의 기미주(羈縻州)였다. 당 초기에는 여러 종족이 당에 귀부하였는데, 당은 이들을 부락별로 안치하여 기미주로 편제했다. 사주(師州)는 그중 하나로 거란과 실위(室韋)를 대상으로 편성한 곳이었다. 당은 기미주를 관리하기 위해 해당 부락의 수령을 자사로 삼았다. 따라서 사주의 자사는 거란이나 실위의 수령일 가능성이 컸고, 고영숙을 거란인으로 보아왔던 그간의 이해에도 일면 타당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고로가 고구려계임이 분명한 이상, 고구려계 인물이 사주의 자사가 되었던 데에는 연유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록을 찾아보면 사주에는 거란과 실위 외에 다른 이들도 거주했었다. 해奚 부락이 그들인데, 당은 634년 또 다른 기미주를 만들어 해 부락을 그곳으 로 보냈다. 그리고 고로의 고구려 유민들이 그 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이 영주도독(營州都督) 휘하 번병(蕃兵)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이 치렀던 전쟁에는 빠짐없이 이민족 병사로 이루어진 번병이 등장하는데, 고로의 고구려 유민 집단도 영주도독의 지휘 아래 당을 위한 전쟁에 동원되곤 했을 것이다.
한편 이 묘지는 그녀의 친정 쪽 가계만 언급하고 있다. 누대에 걸쳐 요서에 뿌리내린 만큼 이 집안이 지역 내에 가진 영향력은 상당했을 것이어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가 쪽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대에 완비된 묘지의 기술 방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무언가의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묘지에는 남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의 관직이 요서부절충도위(遼西府折衝都尉)였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성명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다고 칭송하면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는 않고 있다. 불행이 닥쳤을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남편에 대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고구려 유민의 혼인 관계를 살펴볼 좋은 자료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부자의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었던 문제는 그녀가 죽은 뒤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아마 무덤을 만들어가던 중, 묘지를 제작하기 전에 일어났을 성싶다. 불행을 목도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나마 그녀에겐 다행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