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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 자료 「울릉도사적」과 『항길고택일기』
  • 이원택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재단은 ‘독도의 달’ (10월)을 맞아 지난 10월 24일 ‘장한상(張漢相)과 울릉도·독도’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이어서 25일에는 ‘강릉김씨 항길고택 소장자료 기증식’을 개최하였다. 학술회의에서는 조선 숙종기 울릉도 수토관이었던 장한상의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필사본과 함께 최근 재단이 추가로 발견한 2종의 필사본 등 도합 3종 원본을 소장처인 의성조문국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공개하였으며, 이어서 필사본 추가 발견의 의의에 대한 학술 토론이 있었다. 한편 ‘강릉김씨 항길고택 소장자료 기증식’에서는 강원도 동해시에 위치한 강릉 김씨 감찰공파 항길고택(恒吉古宅)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족보, 고서, 고문서 등 유물 전체를 후손 김상래 여사와 김동욱 씨가 재단에 기증하였다. 방대한 기증 자료 중에는 울릉도 수토(搜討) 관련 기록이 실려 있는 『항길고택 일기(恒吉古宅日記)』가 포함되어 있다.


장한상의 「울릉도사적」 필사본 2종 추가 발견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 자료 「울릉도사적」과 『항길고택일기』장한상(1656~1724)의 「울릉도사적」은 1978년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이 『절도공양세비명(節度公兩世碑銘)』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속에서 발견하였다. 「울릉도사적」은 장 한상의 울릉도 수토(1694)의 구체적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정부의 울릉도·독도 통치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사료다. 당시 이 사료의 발견은 울릉도·독도 연구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장한상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직접 목격하고, 목측(目測)을 통해 실측(實測)에 근사한 독도까지의 거리와 독도의 크기를 서술 한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절도공양세실록(節度公兩世實錄)』과 『교동수사공만제록(喬桐水使公輓祭錄)』이라는 책 속에도 「울릉도사적」이 실려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세 가지 필사본 「울릉도사적」을 서로 비교해 본 결과 『교동수사공만제록』 속의 「울릉도사적」이 가장 먼저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 다음에 『절도공양세실록』, 그 다음에 『절도공양세비명』 속의 「울릉도사적」이 차례로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장한상에 대한 경종(景宗)의 사제(1724)이 들어 있어 편찬 연대가 장한상의 사후라는 것만 추정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연대는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절도공 양세비명』의 마지막에 기록된 ‘임인년 봄 외후손 영양 신광박 쓰다(壬寅春外後裔永陽申光璞書)’라는 것을 단서로 앞으로 연구를 더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 자료 「울릉도사적」과 『항길고택일기』『항길고택일기』에 실린 울릉도 수토 기록의 중요성

『항길고택일기(恒吉古宅日記)』는 그간 연구 자료로 활용되면서 학계에 『환길댁생활일기』 또는 『한길댁생활일기』로 알려진 바 있으며 일기의 일부분이 언론에 공개된 적도 있으나, 이번에 재단에서 거행된 기증식을 통해 전체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항길고택(恒吉古宅)은 강릉김씨 감찰공파가 조선전기 삼척에 세거하면서 항길장(恒吉庄)이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항길(恒吉)은 『주역』의 항괘(恒卦)에서 따온 것으로 집안에 항상 길(吉)한 일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기존의 명칭은 항길의 와전으로 생각되어 잠정적으로 『항길고택일기』라고 칭하기로 하였다.

『항길고택일기』는 1753년(영조29)부터 1904년까지 150여년 간 매년 그 해의 책력(冊曆)에 중요한 일을 해당 날짜 아래 및 윗 여백, 또는 접은 뒷면에 기록하였다. 현재 13책 118권의 분량이 확인되어 약 120년분의 일기가 남아 있는 셈이다. 13책으로 제본된 것 중에 제목이 있는 것도 있는데, 『구봉광음(九峯光陰)』, 『속재거제(俗齋居諸)』, 『속재광음(俗齋光陰)』, 『녹기광음(錄記光陰)』, 『동우광음(東愚光陰)』 등이다. 일기의 저자는 매암(梅菴)김치련(金致璉,1720~1794), 죽헌(竹軒)김응조(金膺祚, 1755~1817), 김시학(金時鶴), 구봉(九峯)김구혁(金九爀), 김연정(金演政) 등으로 추정된다.

일기에는 울릉도 수토 연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다수 있는데, 그 가운데 아홉 번의 기록은 관찬사료(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수토 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로, 이 일기에만 기록이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중앙의 정치가 문란하여 울릉도 수토도 제대로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이 일기 자료에 의하면 세도정치 시기에도 수토가 2년마다 매우 규칙적으로 실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일기 자료에는 수토 관련 세금, 수토전(討田), 수토선의 도착을 탐지하기 위한 후망군候望軍의 운용 등 수토 관련 자료가 다수 기록되어 있어, 향후 조선 후기 수토 제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