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 거란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당 말의 혼란기에 동북아시아에서는 거란이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하였다.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을 세워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며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태조에 이어 즉위한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은 928년에 후당을 멸망시킨 후, 절도사 석경당으로 하여금 후진(後晋)을 세우게 하고, 연운(燕雲) 16주를 차지함으로써 북방지역의 강자로 등장하였다.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는 922년(태조5)부터 시작되었으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친척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여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따라서 942년(태조25) 거란사신이 낙타 50필을 가지고 왔을때 태조는 사신 30명을 유배하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거란이 낙타를 선물로 보내면서 고려와 친선을 도모한 것은 후진과의 전쟁을 앞두고 배후의 위험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결국 후진은 94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할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거란이 먼저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태조의 꿈은 깨어졌다. 이후 그의 공격 목표는 발해에서 거란으로 바뀌었으며, 대신 발해를 고구려와 연계시켜 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은 후진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어 태조의 반거란 행위에 아무런 보복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고려는 태조이래 북진정책을 계속하여 성종대에 가서는 압록강 유역까지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압록강의 금동도黔同島로 추정))에 성을 쌓아 고려가 더이상 북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제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려와 거란의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과 귀주대첩
제1차 전쟁
993년(성종12) 10월에
거란이 침입해오자 성종은 박양유, 서희, 최량을 중심으로 3군을 편성하여 서북부 요충지에 배치했다. 성종도 안북부로 나아갔다가, 거란장수 소손녕이 봉산군(귀주龜州 동남 25리)을 쳐서 선봉군사(先鋒軍使) 윤서안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돌아왔다. 소손녕은 봉산군을
함락시키고는 고려에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거란이 고구려 영역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계승하였는데 고려가 그 영토를 침범하므로 토벌하러 왔다고 하였다. 북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려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어서 그는 80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군사가 고려를 침입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고 큰소리치자 고려 관리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같이 두려움 속에 떨고 있을 때 고려 관원들 내에서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강화를 맺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두했다.
이때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이 서희였다. 서희는 일단 거란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후에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성종은 할지론을 수용하여 서경에 비축한 군량미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남은 양식이 적의 군량미로 사용되지 않도록 대동강에 빠뜨리고 항복하려는 상황에 이르자 일부 관원들과 백성 사이에서 국왕의 무능을 질타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비난을 내세워 서희는 국왕에게 적극적인 대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실 거란과 강화를 맺는 사실 자체가 태조의 유훈(遺訓)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영토를 할양하면서까지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다면 고려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므로 서희는 우선 외교적인 타협책을 강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고려 측의 회답을 촉구하던 거란군이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게 되자, 소손녕 또한 고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거란군이 고려 영토 내에 깊숙이 진군하였다가 고려가 압록강 유역을 차단할 경우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과 수십만의 거란군과 말의 양식조달, 그리고 거란군 상당수가 동경도 관내의 주민으로서 본래 발해의 유민이나 여진인이므로 만일 전선이 불리해진다면 곧바로 고려에 투항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고려와 거란이 강화를 맺을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서희가 회담장에 왔을 때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음에도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송과 교류함을 문제로 삼았다. 이에 서희는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압록강 유역에 거주하는 여진의 방해로 거란과 교류할 수가 없었음을 강변하였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고려 측은 거란과 교류하고 송과의 관계는 단절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고려는 여진을 내쫓고 압록강 유역을 확보하는 실익을 얻게 되었다. 이에 비해 거란 측은 요충지를 포기한 것으로서 이 회담은 고려의 일방적인 외교적 승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지 이미 60여 년이 지나 나름대로 국가 운영방안과 외교정책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거란이 서희의 의도에 말려들어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양보했다면 당시에는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란의 목표는 고려와의 경계를 확정 지어 고려가 더이상 북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거란이 송을 침략할 경우에 고려가 송과 연합하지 못하도록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고려가 여진을 제압한다면 거란으로서는 변방의 위협이 많이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란 또한 영역획정과 국교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된다.
현종대 거란과의 전쟁과 귀주대첩
고려는 1009년 2월, 거란에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를 알렸으며, 그해 4월에는 거란 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과의 친선관계가 여전히 유효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거란 성종은 고려에서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직접 40만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하지만 침략의 실제 이유는 고려가
송과 연맹하여 거란에 협공을 가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고려는 1010년 10월, 강조를 행영도통사, 이현운과 장연우를 부사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거란 성종은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순검사 양규 등이 굳게 지키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진하였다. 그러나 강조가 통주성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히게 되자 거란군은 그 기세를 몰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때 현종은 공주 삼례를 거쳐 나주로 피신하면서 거란에 입조를 조건으로 화친을 제의하였다. 거란 성종은 강조를 살해하고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흥화진·구주·서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내려왔으므로 자칫 퇴로가 끊어질 우려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성종은 현종이 친조한다는 정전조건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군사를 돌이켰다.
거란군이 철수한 이후 고려는 1011년(현종2) 4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회군한 것을 사례하고 이어서 10월, 11월에도 동지사와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유지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끈질긴 재촉에도 친조만은 미적거리다가, 1012년 6월에 드디어 국왕의 질병을 핑계로 친조할 수 없음을 알렸다. 이에 분노한 거란 성종은 인질로 데려간 하공진을 죽이고 강동 6주를 빼앗겠다고 통보했다.
2차전 이후 거란이 계속 침략하는 이유를 고려의 친조약속 위반과 강동 6주 반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전연지맹 이후 거란의 국제적 위상이 달라진 것 또한 주요한 요인이었다. 거란과 송은 대등한 황제국으로 칭했으나 실질적으로 거란이 송보다 우세한 위상을 지니면서 고려에 대한 관계도 형식적인 사대가 아니라 완전한 복속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거란은 소규모의 침략을 계속하여 보주를 점령함으로써 압록강 이내에서 고려를 공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는 고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고려는 송과 다시 교류하며 1017년부터는 송의 연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고려의 친송정책은 다시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불러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란은 1018년(현종9) 10월,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삼아 군사 10만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명의 출정군을 영주(寧州)에 배치했다. 동원된 군사의 규모로 보아서도 고려의 결의를 짐작할 수 있다. 거란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왔을 때 고려가 20여 만으로 방어했던 것이다.
1018년 12월, 고려는 흥화진에 기병 1만 2천 명을 산골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거란군이 도착하자 막은 물을 터고 복병을 내어서 큰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소배압은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진군했으나 강감찬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선전으로 크게 패하였다. 개경 인근에서 계속 패전을 거듭한 거란군은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고려의 반격을 받았는데 특히 이듬해 2월의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은 참패하여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포로와 말·낙타·갑옷·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다고 한다.
강감찬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철저한 방어로 거란군은 참패하고 물러갔다. 이에 양국은 화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조약에서 거란은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지하고 강동 6주를 거론하지 않았으며, 오랜 전쟁에 지친 고려 또한 거란의 보주 점령을 묵인한 채로 화의를 맺었다.
3차에 걸친 고려 침입으로 거란이 얻은 군사적 거점은 내원·보주(保州, 抱州로도 불림)지역이었다. 이곳은 거란이 고려 영토 내에 구축한 교두보였으므로 고려는 화의를 맺은 이후에도 수차례 반환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덕종 대에 고려가 천리장성을 구축하게 된 것은 내원 보주에 주둔한 거란군의 위협을 방어하려는 것도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고려의 대거란 외교의 특징
고려 시대의 동아시아는 한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여 주변국에 일방적인 조공을 강요하던 시대가 아니라 비슷한 세력을 가진 여러 나라가 공존하던 다원적 시대였다.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대략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942년(태조25)부터 993년(성종12)까지의 교류가 없던 시기, 993년부터 1019년(현종10)까지의 전쟁기, 1020년(현종11)부터 1125년(인종3)까지의 화평기이다.
고려와 거란 관계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하여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고 사신을 귀양 보냄으로써 그들과 친교를 맺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 성종 때까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993년에 거란의 고려침략이 시작되어 약 30년간 양국이 전쟁상태로 공방을 거듭하다가 1020년(현종11)에 화평조약을 맺게 되었다.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기에 거란이 주로 침략하기는 했으나 고려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지는 않았다. 1차 때 거란은 고려가 쉽게 굴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님을 깨닫고 강동 6주의 고려 소유를 승인하는 대신 송과의 단교와 거란과의 친교 등 피차간의 요구조건을 조절하는 선에서 고려와 화약을 맺었다.
이후 송을 굴복시켜 전연의 맹을 맺은 거란은 고려에도 조공 책봉관계를 확약받고자 다시 고려를 침략했다가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가 친조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이번에는 강동 6주 반환을 내세우며 수차례 침략하여 보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고려가 다시 송과 친교를 맺자, 이번에는 소배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략하게 했다. 여기에서 거란은 귀주에서 참패하고 고려와 강화를 맺게 되었다.
30년 전쟁의 결과 거란은 보주 등 압록강 유역을 확보했으며 고려의 외교 방향을 송에서 거란으로 바꾸었다. 고려는 비록 거란에 조공을 바치고 있지만, 이 전쟁은 거란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3차전에서는 거란이 참패하고 고려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높아졌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동북지방 여진 부락에서 자진해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 이를 잘 말해준다.
거란과의 전쟁을 겪은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의 중심세력이 거란으로 바뀐 것을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외교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는 단일한 세력 아래 일원적인 상하관계가 아니라 고려, 거란, 송, 서하 등 여러 나라가 비교적 평등하게 공존하는 국제질서 속에 있었다. 이것은 고려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승리한 데서 이루어낸 쾌거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