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 쓰시마. 부산과 쓰시마 북단 가미쓰시마 지구와의 최단 거리 49.5㎞. 날씨가 좋으면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다. 지리적 근접성을 매개로 쓰시마에서 전개된 한국사도 많다. 발해의 사신 파견,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고려·조선의 쓰시마 왜구 정벌, 조선통신사 사행, 덕혜 옹주의 결혼 등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들의 굵직굵직한 정치·외교적 사건이 쓰시마를 아우른 공간에서 펼쳐졌다. 그 흔적들이 쓰시마에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울릉도쟁계’의 도화선이 된 조선인 억류 사건
쓰시마에서 펼쳐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26년 전인 1693년, 조선인 둘이 쓰시마에 억류된 사건이 있었다. 같은 해 3월 울릉도에 간 이들은 거기서 마주친 일본인들에 끌려 오키섬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요나고(지금의 돗토리현 요나고시)로 갔고, 요나고와 돗토리에서 약 1개월간 머물다가 나가사키로 보내졌다. 9월에 다시 쓰시마로 보내져 약 2개월간 억류되었고 11월 초에 조선의 왜관으로 보내졌다.
동래 어민 안용복과 박어둔의 도일(渡日)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에도 막부 사이에는 울릉도 소속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울릉도쟁계’라 한다. 두 사람을 호송한 차사 정관 다치바나 마사시게가 조선 어민의 ‘다케시마(울릉도)’ 출입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한 소 요시자네의 서신을 전달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은, 1696년 1월 에도 막부가 일본 어민의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을 내리면서 일단락되고,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699년에 종결되었다. 이 논쟁의 도화선이 된 조선인 두 사람의 사건의 일부가 쓰시마에서 펼쳐진 것이다.
안용복 억류사건을 단초로 조선 땅으로 재천명된 울릉도
1693년 음력 6월 4일 안용복과 박어둔은 무사와 의사, 요리사 등 총 90명의 호위 하에 가마에 실려 돗토리를 떠났다. 음력 6월 30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조사를 받고 음력 8월 17일 나가사키로 파견 나와 있던 쓰시마의 영호사(迎護使) 이치노미야 스케자에몬에게 인도되었다. 이들이 나가사키를 떠나 쓰시마 후추(府中)에 도착한 것은 음력 9월 3일. 후추는 쓰시마 동남쪽, 소씨(宗氏)의 쓰시마 후추번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현재 이즈하라 항(港)이 있는 이즈하라 지구를 말한다.
이들은 조카마치(城下町) 즉 이즈하라 성 바깥에 조성된 거리 어디쯤 있었을 이치노미야 스케자에몬의 집에 억류되어 있었을 것이다. 『죽도기사』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의 숙소를 사자의 집으로 정하고, 사무라이 4인 1조로 하여금 숙소를 경호하게 하며, 조선인이 숙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치노미야 스케자에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5대 번주 요시미치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부고사 정관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조선 관련 일을 했던 중고위급 번사였을 것이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이들은 여기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 돗토리에서 받은 은화와 문서를 겁탈당했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선 정부가 몸값을 내야한다는 등의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전자는 1693년 조선으로 귀환한 후 한 말이고 후자는 이들 중 한 사람인 안용복이 1696년에 도일을 감행한 일로 비변사에서 추문을 당할 때 한 말이다. 문서란 울릉도·자산도(우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한다는 내용의 “관백의 서계”이다.
같은 해 음력 10월 22일, 이들은 조선으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이즈하라 항을 출항한 배는 북상하다 쓰시마 북단에서 서쪽으로 돌아 서북단의 와니우라 항을 지나 남쪽에 있는 사스나 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부산을 향해 북진했다. 음력 11월 1일에 절영도에 도착하여 머물고 다음 날인 2일에 왜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음력 12월 10일 일본 측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왜관에 온 접위관과 동래부사에게 인계되었고 감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은 한일 경계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울릉도쟁계 결과 에도 막부는 일본어민의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1696년 1월의 일이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1694년에 장한상을 보내어 울릉도 상황을 살피게 하고 빈 섬으로 놔두었던 울릉도에 2년에 한 번씩 수토사를 보내 관리하게 하는 정책을 폈다. 이 사건은 울릉도가 조선 땅으로 재천명되고 수비가 강화되는 단초가 된 사건이었다.
독도의 지리적 실체를 한일 역사에 남긴 안용복
독도는 조선 조정이나 에도 막부의 관련 조치에서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용복은 ‘송도(松島,마쓰시마)는 우산도로서 우리나라 땅’이고 ‘근년에 내가 이 곳(오키섬)에
들어와서 울릉도·우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의 서계까지 받았는데’ 라고 말한다. 에도 막부는 다케시마(울릉도)뿐 아니라 마쓰시마(독도)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돗토리 번주는 두 섬 다 돗토리 소속이 아니라고 한다.(「에도
막부의 질문에 대한 돗토리 번주의 답변」(1695)) 이전까지 다소 관념적 존재였던 우산도가 이 사건으로
인해 독도라는 지리적 실체로서 드러나게 되고 그 소속 또한 명확해 진 것이다.
300여 년 전 쓰시마를 걸은 동래 어민 두 사람의 사건은 동해의 두 섬의 소속을 재확인 시켰다. 한국의 영토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후세의 해석이고 막상 이 사건의 당사자에게는 어떤 사건이었을까? 때는 해금(海禁)시대.
상인들이 자유롭게 외국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에 조선의 미천한 백성 둘이 육로와 해로를 아우른 1,000여 킬로미터의 일종의 외국 나들이를 한 것이다.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보자면 이 사건은 이들에게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지 않은 많은 부분에서 이들이 꼭 그렇게 느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 쓰시마. 지금은 많은 한국인으로 넘쳐난다.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을 떠난 고속선 서너 척이 거의 매일 수 백 명씩의 한국인을 북쪽의 기타카쓰 항이나 남쪽의
이즈하라 항에 내려놓는다. 이 중 많은 이들이 쓰시마에서 펼쳐진 한국사를 찾아 여기 저기를 걷는다. 그 끝에 그 옛날 동래 어민 둘이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상상해 보면서 그 흔적을 찾아 걸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