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중앙아시아학회장, 동양사학회장 및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부터는 국제역사학회 한국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몽골 제국과 고려』,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황하에서 천산까지』,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 등이 있고, 『유목 사회의 구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이슬람 1400년』, 『몽골 제국 기행: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1~4권) 등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출현은 세계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현상 중 하나다. 일개 유목 부족으로 출발한 그들이 거대한 기마 군단을 앞세워 농경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지막에는 해양까지 장악하여 전 지구적 규모의 거대한 정치 조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 부르는 시대를 탄생시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포용하며 유라시아 문명국들을 정복한 몽골제국. 이 제국이 동서양 문명과 세계사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물론 유목민족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시선으로 되살린 몽골제국사 연구의 선구자, 중앙유라시아사 분야의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서울대 명예교수 김호동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대담 | 박장배, 재단 북방사연구소 소장 |
Q. 올해 2월 퇴임하신 이후 소회가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많은 연구 업적을 내면서 학계에 ‘중앙유라시아사’라는 용어를 정착시키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중앙아시아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그간의 연구에서 아쉬운 점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A. 특별히 정년이나 퇴임을 의식해서 초조해하거나 불안한 마음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35년 가까이 몸담았던 곳을 떠나 출근할 필요도, 강의할 필요도 없게 되니 ‘아, 정말 내가 퇴임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으로는, 직업의 특성상 재직 중에도 연구년을 보낸 적이 있다 보니 퇴임이 실감 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 때문인지 단절감이 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가 ‘중앙유라시아’라는 용어를 즐겨 쓰기는 했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정착시키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초원과 사막(오아시스) 두 지대를 역사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는 용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자에 출간한 제 책에도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라는 제목을 붙인 겁니다.
Q. 그렇다면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중앙유라시아’라는 지역만이 가지는 특징이나 문화적 특수성이 있을까요?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 지역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이에 대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A. 먼저 ‘중앙유라시아’는 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중국, 몽골과 같은 국가의 전부 혹은 일부 지역을 말합니다. 이처럼 일차적으로는 지리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문화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지난 수천 년간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을 지니면서, 내적으로는 유사한 문화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목-정주’, ‘초원-오아시스’ 문화권입니다. 초원은 거대하고 강력한 유목제국의 고향이었던 반면, 사막의 오아시스는 멀리 떨어져 존재했기 때문에 분산적이고, 주민 수도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건설한 국가는 협소하고 미약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유목제국 안에 편입되기 일쑤였습니다.
한편 실크로드가 오아시스들을 통과했기에 이곳 주민들은 원거리 교역을 주도하는 상인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의 제국 건설을 도왔고 정주지역의 문화와 기술을 유목민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앙유라시아는 초원과 오아시스라는 상이한 생태 환경에서 살았던 유목민과 정주민이 정치적으로는 지배와 종속을 통해, 경제·문화적으로는 교류와 호혜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곳입니다. 이곳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가장 중심적인 지역인 동시에 거대한 유목제국의 고향으로, 주변 문명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문화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중앙아시아사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 일부인 몽골제국사도 깊이 있게 연구하셨습니다. 최근 국내외 역사학계에서는 몽골제국사 분야에서 젊은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관련 성과가 쌓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구미 등지에서 이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아무래도 몽골제국사가 갖는 ‘세계사적 의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이었고 유라시아 전역을 석권한 세계 제국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것을 하나의 제국이 아니라 중국이나 서아시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몽골제국사를 ‘총체적 관점(a holistic perspective)’에서 접근하고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지난 30년간 해외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났고, 또 많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젊은 학자들이 몽골제국사에 대해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Q. 올해는 한·몽 수교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보통은 몽골제국을 ‘유목-정복국가’로 알고 있는데, 우리 학계 혹은 사회에서 몽골제국사 연구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A. 몽골제국에 대한 이해는 고려 후기의 대외관계사뿐만 아니라 내적인 역사 전개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지난 20여 년간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대단히 활발했고 또 크게 변화했습니다. 몽골제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몽골이 고려사의 내적 구조에 어떤 굴절을 가져다주었는가를 밝히려는 많은 연구 성과가 배출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를 가능케 한 가장 커다란 원인은 몽골제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준 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왕의 연구는 몽골제국(大元)과 고려의 관계를 전통적인 한중 관계의 입장, 즉 왕조사적(王朝史的) 관점을 바탕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몽골제국의 구조적 변화의 실상을 상당 부분 왜곡시킨 이해 방식을 반성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탐구하고자 한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목민이 건설한 몽골제국과 그들의 중국 지배가 지니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 인식에서 출발하여 고려-몽골 관계사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학술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이러한 새 접근 방법은 비단 몽골-고려의 관계뿐 아니라 한중 관계 전반에 걸쳐서 확대되어야 합니다. 즉, 앞으로는 거란 요제국, 여진 금제국, 만주 청제국과 한반도 정권과의 관계 전체에 대한 재고(再考)가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Q. 최근에는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의 책임편집을 맡아 심혈을 기울이고, 해외 학계와도 긴밀한 학술 협력을 이어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The Cambridge History of the Mongol Empire)는 2004년 이스라엘 히브루 대학의 미갈 비란Michal Biran 교수와 제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출판 계획서를 제출하고 승인받아 시작된 것입니다. 벌써 16년이 지났네요. 이 책을 기획한 이유는 지난 30년간 몽골제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포괄하면서 제국사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권은 제국의 역사를 시대별 혹은 주제별로 다룬 것으로 27개 장章으로 되어 있으며, 제2권은 주로 언어별 사료 소개와 설명이 1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필자로는 미국, 유럽, 한국, 중국, 일본 등 세계 각국 40여 명 이상이 참여합니다. 현재는 편집자 각각의 코멘트와 수정 요구를 반영한 원고가 모두 수합된 상태로 색인과 키워드 등의 작업까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늦어도 7월 중에는 출판사로 원고 전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서 또 새로운 교정 작업을 거쳐야 하니 아무래도 완성된 책의 출판은 빨라도 2021년 말이나 되어야 할 듯합니다.
Q.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연관성은 앞으로 필자가 계속 연구해 나가고 하나씩 밝혀 나가야 할 주제’라고 하셨는데, 현재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이들 관계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A.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요약한다면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가 남긴 ‘충격과 유산(impact and legacy)’이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타타르의 멍에’가 상징하는 부정적인 측면과, ‘팍스 몽골리카’가 상징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사에 남긴 충격과 유산을 어떻게 탐구하고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각지를 지배하며 초원의 유목적 전통에서 기인한 다양한 제도들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시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몽골제국의 군사, 민정, 교통, 통신 등과 같은 제도를 ‘제국적 제도’라고 부르는데, 장차 연구를 계속해서 보다 포괄적인 결과물을 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이슬람 문명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오셨는데요. 유라시아 유목제국들과 이슬람 문명에는 어떤 접점이 있고,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요?
A. 이슬람권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많은 연구자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관심도 초보적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이 분야와 관련하여 교편을 잡고 강의를 하는 분들도 대체로 역사보다는 언어 방면에 치우쳐 있지요. 분명 앞으로는 이슬람 문명권 연구에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유라시아 지역 유목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슬람권과의 연결고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래 우리나라는 유목제국사를 ‘북방사’로 부르며 ‘한국이나 중국의 북방에 위치한 이민족의 역사’로 치부하였지만, 중앙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지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유목제국과 수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서아시아 문화권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크로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중국 장안長安과 서구 바그다드 혹은 로마를 잇는 교통로나, 단선적이고 정주定住 문명 중심의 역사관으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유럽-서아시아-중앙유라시아-동아시아라는 역사적 공간 즉, ‘면面’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는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아시아, 특히 이슬람 문명권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재단은 2018년 ‘북방사연구소’를 신설하고 북방 민족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재단을 비롯해 우리 학계가 향후 중앙아시아사 연구, 특히 몽골제국사 연구에서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A. 동아시아 즉, 한국과 중국이라는 지리적 한계에서 ‘북방사’를 해방시켜 ‘중앙유라시아’적인 시각에서 보다 넓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북방=중앙유라시아를 하나의 독자적인 역사 공간으로 인식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동아시아·서아시아·유럽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이루었던 역사적 유기성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 물론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도 그 폭과 깊이에서 한 단계 더 발전을 이루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