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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한국
  • 최덕규,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한국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1910)가 서울에서 12(1885~97)간 활동한 이력은 고종 시대 다른 열강의 서울 주재 외교 대표들과 비교해보아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왜 그랬을까? 무능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왜 그리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다가 소환되어 조선 주재 공사를 마지막으로 외교 무대를 떠났을까? 이는 한국 근대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도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조선에서 장기 복무한 것은 아마도 조선에 대한 애정과 연민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현실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국 라트비아(Latvia)와 유사한 상황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었다. 오늘날 인구가 200만이 채 안 되는 라트비아는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베베르가 태어난 리에파야(Liepāja)가 통상항구이자 얼지 않는 항구로서 러시아 발트 함대의 기지 역할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의 출발지는 바로 리에파야(러시아명: Либава)였다. 베베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중국-몽골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발트 지역 독일인들이 유럽과 러시아 학계의 통로 역할을 했던 문화적 영향이 컸다. 라트비아 출신의 젊은이들이 기회를 잡기 위해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드는 것과 식민지 조선의 유학생들이 동경으로 떠났던 장면이 겹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한일관계가 그러하듯 라트비아 역시 소련의 식민 지배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수도 리가(Riga)에 위치한 점령박물관(The Museum of the Occupation of Latvia)은 주변 강국인 소련(1940~41; 1944~91)과 독일(1941~44)의 지배를 받았던 라트비아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양대 강국의 점령 기간 동안 인구의 3분의 155만 명이 학살되거나 실종되었다. 특히, 소련 통치하에서 민족융합을 명분으로 러시아인들을 라트비아로 이주시킴으로써 라트비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1991)한 이후에도 러시아계가 인구의 27%를 차지한다. 따라서 소련 해체 이후 라트비아에 남겨진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형식으로 양국 간의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한국


조선의 독립과 연결된 러시아의 안전

베베르는 인구가 적고 멀리 떨어진 연해주와 극동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필수라고 판단했다. 한국 땅에 외국군이 주둔할 경우 이는 연해주 침략의 발판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청일전쟁 직후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정책에 강력히 대응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베베르가 청일전쟁 승전국인 일본을 압박한 논리는 정연했다. 청군의 한국 파병에 맞서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면, 전쟁의 종식은 일본군의 철수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청일강화(1895. 4. 17)가 이루어졌음에도, 일본군은 한국의 주요 도시에 다시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삼국간섭(1895. 4. 23)을 주도한 러시아는 일본군을 한국에서 철병시키고자 했던 고종을 지지하게 되었다.


고종은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국을 자주 독립국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주둔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고종은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한국 정부를 간섭하고 있는 일본의 힘의 원천이 바로 한국 주둔군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서울에 다시 주둔한 일본군은 1년 전 경복궁을 점령(1894. 7. 23)했던 만행을 재연할 소지가 다분했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서울 주둔 일본군이 관여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본의 소행임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왕후는 서인(庶人)으로 폐위되어 종적을 감춘 비운의 여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베베르는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친일 내각을 물리치고 고종이 자신의 내각을 꾸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인들은 처음부터 이 사건에 관여되지 않았다며 부정했다. 히로시마 재판소는 일본인 가담자들을 증거 부족으로 무죄 방면(1896. 1. 20)하였다. 조선인 연루자들도 아무런 처벌 없이 고위직에 남아있었다. 만약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성공적으로 이어(移御)하지 못했다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한국


학자 외교관 베베르의 신념

베베르는 러시아에 상주하는 한국공사가 없었던 시절, 차르 정부와 서울 정부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외무성은 베베르가 한국 정부의 대변인 같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외무성이 만주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조선 카드로써 일본과 타협하고자 한 정책에 그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이 러시아 제국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그의 학자적 신념은 이후 역사가 증명하였다.


그는 본국으로 소환된 후 외무성을 나와(1900) 학자의 길을 걸었다. 다만,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 경축 행사에 니콜라이 II세의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1902~03)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1904년 러시아 황립지리학회 산하 지명표기특별위원회에서 지명 표기 단일화 작업에 참여했다. ‘한국어와 한자의 한국식 독음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 그는 1910년에 사망했는데 독일 드레스덴(Dresden) 근처의 라데보일(Radebeul)에서 말년을 보낸 별장의 옥호가 코레야(Корея)’였다.


2011년 한국과 라트비아 수교 20주년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헬싱키에서 쌍발 비행기를 타고 리가로 향하면서 자문해보았다. 러시아는 베베르를 소환했음에도 왜 러일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까? 한국에 대한 애정과 학자적 통찰력을 지닌 그를 소환하고 영혼 없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석양의 발트해는 여전히 푸르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