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일본 외무성 산하의 일본국제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 웹사이트와 유튜브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듯한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에는 “1905년 독도가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되기 전부터 일본인 어부들이 독도 주변에서 강치잡이를 했다”는 증언이 담겨 있다.
영상은 증언자의 조부 이시바시 마쓰타로(石橋松太郞)를 ‘독도 강치잡이의 개척자’로 소개한다. 그는 1904년 9월 일본 정부에 ‘영토 편입 및 임대 청원서’를 제출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와 함께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했다고 하면서 ‘1905년 독도가 시마네현에 편입되기 이전의 독도 어업 실태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2018년 연구소가 ‘1905년 독도 편입 전후 독도에서의 어업 실태’를 밝히기 위해 후나스기 리키노부(舩杉力修) 조교수(시마네대학 역사지리학과)에게 의뢰한 독도 관련 사료 및 청취 조사 사업의 결과를 담은 영상이다. 2019년부터 연구소는 청취 조사와 병행해서 독도와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을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독도와 관계있다고 주장하는 5인의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고, 영어, 한국어 등의 외국어 자막이 들어간 영상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영상은 학교 교육 등에 활용하여 독도에 대한 기억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홍보하려는 목적하에 제작한 것이다.
일본 정부, 독도 관련 정책 공세 전환
최근 일본 정부는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 아래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고 선전하는 홍보·교육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2013년 일본 정부는 영토·주권대책기획조정실을 설치하고 영토·주권 관련 정책을 공세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2020년 1월,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영토·주권전시관을 확장·이전했다. 3월에는 2021년도부터 사용할 지리, 공민, 역사 과목의 모든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합법적으로 편입했다”, “일본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넣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의 이같은 주장은 수십 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선전과 홍보·교육의 인프라가 더욱 증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실태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육·홍보는 물론 일본 국내의 조사·연구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영토·주권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 수행을 위해 교육 현장과 연계하여 홍보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으며, 정부 위탁사업으로 수집한 자료는 일반용, 교육용, 연구자용으로 구분하고 해설을 첨부해서 보다 알기 쉬운 형태로 전시관 혹은 웹사이트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또한 영토·주권 관련 역사, 혹은 문헌·사료에 관한 학술 조사나 수집 분야에 종사하는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영토 관련 사업에 동원되는 일본국제문제연구소
독도와 관련된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을 홍보하기 위해 최근 동원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일본국제문제연구소다. 국제 문제 연구, 지식 보급 및 해외 교류 등을 활발히 하기 위해 1959년에 설립됐다. 외교 문제의 중장기적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기관으로, 정책 연구·심포지엄·강연회·출판 사업 등이 중심이다. 2020년 미국의 한 기관이 일본 및 아시아 지역 내 1위, 전 세계 13위의 연구기관으로 선정한 일본 최고의 정책 싱크탱크이기도 하다.
2017년에는 연구소에 영토·역사센터를 설치해서 영토·주권·역사 분야에서 조사, 연구, 홍보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동 분야에 관한 국내외 자료의 수집·정리·홍보, 국내외 공개 심포지엄 개최, 조사·연구 실시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해외의 관심 계층이나 정책 커뮤니티가 이용하기 쉽도록 1차 자료 등의 외국어 번역(특히 영어)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연구소가 발간하는 『국제문제』에 게재하여 홍보한다.
(상)독도에서 자망으로 강치를 잡고 있는 오키 어민(1934)
(하)잡은 강치를 나무 상자에 산 채로 넣고 있는 모습(1934)
ⓒ서해문집
강치잡이는 한반도 수탈의 증거
19세기 말 대륙 진출과 한반도의 보호국화를 도모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명성황후 시해 등을 거치며 조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03년 6월 어전회의에서는 “과거 수 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한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결의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의 세력 하에 둔다”는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해 격퇴했고, 육군도 인천 상륙 후 곧바로 경성으로 들어갔다. 더 나아가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뒤 군사상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역을 접수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 야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5월 각의에서 결정하고 6월에 일왕의 결재를 받은 ‘제국의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이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사 침략과 경제 침략을 자행하는 근거로 작동했다. 이에 더하여 1904년 8월 일본은 한일협약을 체결해 군사 및 재정 실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외교에 관해서는 한국 정부의 조약 체결권을 제한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했다.
일제가 한반도 침탈을 본격화하기 위해 한국의 재정, 외교, 군사권을 빼앗아간 후, 본격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본인들의 독도 강치잡이는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아니라 한반도 수탈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