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황제의 날발(捺鉢) 모습
거란 황제는 5개의 궁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하며 통치하는 날발제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날발 소개 영상, 필자 촬영)
북방 왕조를 해석하는 틀, 정복왕조론
1949년 미국학자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정복왕조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거란 이후 한족 지역에 북방민족이 건립한 왕조를 ‘정복형 왕조’라 하고, 거란·금·원·청이 대표적이라 하였다. 정복형 왕조는 아주 짧은 시간에 무력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일부 혹은 전체 한족 지역을 자신의 판도로 만들었고, 내륙아시아 혹은 그 연장선인 조상의 근본이 있는 지역을 자기 정권의 영토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였으며, 한족화를 보류하고 끝까지 자기 민족의 특징을 유지하고자 했다는 특징이 있다.
기존의 관점에서는 ‘야만의 정복자는 그들에 의해 정복되고 발달한 문명에 의해 정복된다’는 모델로 북방 왕조를 보았다. 정복자인 북방 왕조는 중원의 정치 제도를 비롯한 유학사상을 수용하여 점점 한화되어 사라졌는데, 그 원인은 한족 문명이 더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복왕조론의 핵심은 북방 왕조가 모두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한족중심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포겔의 정복왕조론은 1936년 미국 인류학자 레드필드(Redfield), 린튼(Linton), 허스코비츠(Herskovits)가 제기한 문화변용(acculturation)을 이론적 배경으로 한다. 문화변용이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집단이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한쪽 혹은 양쪽 문화가 변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문화를 접촉,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 재구성되거나 새로운 의미로 창조되는 현상을 말한다. 서로 이질적인 북방의 유목문화와 남방의 농경문화는 접촉과 교류를 통해 공생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형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두 문화와는 다른 제3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포겔은 거란 등의 정복왕조가 농경과 유목 두 문명이 공생하는 제3의 문화 형태라고 하였다.
1949년 포겔의 글이 발표된 후 일본 학자들은 ‘포겔이 정복 주체인 북방민족의 관점에서 정복왕조를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시라토니 구라키치(白鳥庫吉)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등 선대 학자의 관점을 계승하여 중원의 한족 정권과 비한족 정권의 관계를 ‘남북대립론’, ‘이민족 통치 중국론’으로 설명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일본의 정복왕조론은 중국 남북 지역의 차이와 한족과 비한족의 대립을 강조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북방 왕조의 도성
베이징에는 거란의 남경성(南京城), 금의 중도성(中都城), 원의 대도성(大都城), 명·청의 북경성(北京城)이 있었다.
중국 학계의 대응과 특징
중국 학계는 대체로 정복왕조론을 회피하고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 연구자는 ‘정복왕조론은 중국의 분열을 조장하고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복무하는 이론’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서구의 정복왕조론과 일본의 정복왕조론은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포겔은 북방민족사회를 중국 정치 체제에서 분리하지 않고, 거란·금·원·청은 모두 중국 군주제의 구성 부분이라 하였다. 일본의 정복왕조론은 남북대립론, 이민족 통치 중국론을 강조하여, 남방과 북방 지역의 차이, 한족과 비한족의 대립을 강조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서양 학계가 문화적 측면에서 북방문화와 한족문화의 변용에 관심을 가졌다면, 일본은 정치적 측면에서 북방과 한족의 민족적,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학계는 서양과 일본학계의 정복왕조론에 대응하여 하나의 중국, 즉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북방과 남방, 북방민족과 한족을 포괄하려 하고 있다.
1986년 장보취안(張博泉)은 ‘중화일체론’을 주장하였고, 1988년 페이샤오퉁(費孝通)은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역사학적 접근이고, 후자는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중국 내 56개 민족은 다양한 기원이 있으나 교류를 통해 중화민족으로 일체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재 중국학계는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에 입각하여 정복왕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정복왕조는 중화민족으로 일체화되는 과정일 뿐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북방민족과 한족이 교류를 통해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상태’, 즉 중화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국가, 거란』 동북아역사재단(2020)
왜, 다시 정복왕조론인가
중국은 현재적 관점에서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 북방지역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북방지역 민족이 건립한 국가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편입하였다. 동북지역의 경우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 지역의 역사를 한족 중심의 역사로 재편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중원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북방민족의 독자적 민족사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 내륙이나 북방민족은 서양과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본을 보면 중국의 오월(吳越) 시기부터 교류했지만, 중국 내륙의 변화로 인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중국·북방민족과 직접 교류한 것은 근대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한국은 북방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북방과 중국 내륙의 국제 질서 변화는 한반도에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 학계의 북방왕조에 대한 정복왕조론적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재단 북방사연구소는 한국적 관점의 정복왕조론 정립을 목적으로 거란·금·원·청에 대한 연구와 이론서 발간 사업을 진행중이며, 그 첫 단계로 『움직이는 국가, 거란』(동북아역사재단, 2020)을 출판하였다. 재단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거란 사회를 단선적인 한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2020년 11월 현재 두 번째 정복왕조인 금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재단은 한국적 관점을 담은 정복왕조론의 이론적 정립을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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