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한국인 약 2만 1천 명이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되었다. 유족들은 아버지를, 형을, 오빠를 더는 모욕하지 말라며 200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2013년 제소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서 제공한 원고 여섯 명의 진술서와 사진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진술서 일부만 실었다. 진술서 전체는 재단이 발간한 『식민 청산과 야스쿠니』에 실려 있다.
정리 | 남상구,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최상남 원고의 아버지 최판룡
최상남 원고의 아버지 최판룡은 1920년 3월 4일 생으로 1941년 육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5년 7월 22일 미얀마에서 사망했다. 유족에 통보도 없이 1959년 4월 일방적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저는 오늘 제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해버린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에 중대한 책임을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야스쿠니신사에서 제 아버지의 이름을 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저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최판룡의 유일한 자식 최상남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때문에 머나먼 버마까지 끌려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가족도 모르게 지금까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1941년에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삼촌, 고모 두 명, 그리고 갓난아기였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편배달을 하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장남인 아버지는 자기가 전쟁터로 가지 않으면 동생이 대신 가야 한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지원병으로 입대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호적에 1940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38년생입니다. 당시 세 살이었던 저는 아버지가 배를 타고 전쟁터로 떠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제 고향 섬마을 지도(智島)의 부두에서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배에는 아버지와 함께 전쟁터로 가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21살, 어머니는 23살이었습니다. 두 분이 결혼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아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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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가족들이 얼마나 애타게 아버지를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는 고향에서 66㎞나 떨어진 목포까지 작은 고깃배를 직접 몰고 가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목포까지 가신 것입니다. 무려 한 달 반이나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지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다른 젊은이들을 보며,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크게 실망하고 슬퍼하셨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자식과 손주들을 키우는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관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1945년 7월 22일 버마에서 전사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이 아버지의 유골을 가져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골이라고 했지만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작은 가루 같은 것이었습니다. 끝내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머나먼 이국땅 버마에서 가족을 그리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슬픕니다. 유골이 되어 돌아온 자식을 눈앞에서 확인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젊은 나이에 남편을 빼앗긴 어머니의 슬픔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먹먹해집니다. 그 후 어머니는 하나뿐인 자식인 저에게 의지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 아버지의 유골이 묻힌 묘소를 찾아가 아들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나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1961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사망신고를 하고 호적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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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공부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도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일본군에 지원했다는 것을 숨겨야 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진을 늘 책 속에 꽂아두고 그리워하면서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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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식구의 가장으로 먹고살기 위해 고생을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해자 단체인 유족회에서 활동하며 아버지에 관한 기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버지가 일본군에 지원했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움과 원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유족들과 함께 활동하고 역사를 공부하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가 어땠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때문에,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가야 했던 아버지를 생각하자 원망과 미움이 존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를 숨기고 살아 온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 때문에 입대한 아버지가 끝내 돌아오지 못해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 온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 인생을 생각하니 얼마나 억울한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야스쿠니신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뺄 때만이 저는 비로소 어머님 영전에 부끄럽지 않게 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일본이 평화헌법을 바꿔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변하려 하는 것에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아버지가 그러한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는 지금이라도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제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뺄 것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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