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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일상의 소중함을 보여준 실학자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 박장배, 재단 북방사연구소 소장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 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흔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사람으로는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만 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서유구는 세상 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곡식이고 세상만사 중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농사다.”라고 했다. 서유구가 말한 농사는 비단 농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제 활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성취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사실상 그는 잠자는 문화광맥(文化鑛脈)이었다.

 

 

모든 지식을 망라한 실용 지식 백과사전

서유구 초상

 

 

모든 지식을 망라한 실용 지식 백과사전


최근 사회 일각에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진병춘의 풍석 서유구(2014)에 의하면 2003년 소장학자들이 임원경제연구소를 조직하여 임원경제지번역에 매진, 순차적으로 출판 중이다. 이는 총 16개 분야, 113, 28천여 개의 표제어, 252만 자로 쓰여진 방대한 분량의 실용 지식 백과사전으로, 16개 분야로 나누어 기술하였기에 임원십육지라고도 한다. 이 책은 농서農書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동시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망라한다. 이 책의 독자는 사대부에 머물지 않고, 생업에 종사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도 포함한다.


서유구는 1813(순조 13)부터 본격적으로 임원경제지편찬을 시작하였다. 이 책은 30년에 걸쳐 편찬되었고, 서유구 사망 3년 전인 1842(헌종 8)에 완성되었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서적은 총 893종에 달하는데 국내 서적 100여 종, 중국 서적 800여 종이다. 종 수는 현저하게 차이나지만 글자 수를 살펴 보면 인용 비중이 비슷하다고 한다.


임원경제지본리지: 곡식 농사(136), 관휴지: 채소·약초 농사(42), 예원지: 화훼 농사(52), 만학지: 과실나무 농사(52), 전공지: 길쌈(52), 위선지: 기상과 천문 자료(4), 전어지: 목축·양어·양봉·사냥·어로(42), 정조지: 음식·요리(74), 섬용지: 건축·도구·일용품(42), 보양지: 건강·양생(83), 인제지: 의학(2811), 향례지: 의례(52), 유예지: 교양(63), 이운지: 문화·예술(84), 상택지: 풍수(21), 예규지: 상업(52) 백과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경제지』 속의 음식·요리 백과 집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 소장

 

 

서유구의 생애


서유구는 1764(영조 40) 11월 아버지 서호수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나 184511월 여든 둘에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는 1790(정조 14)부터 16년간의 1차 관직 생활 시기, 1806(순조 6)부터 17년간의 방폐기(임원 생활기), 1823(순조 23)부터 16년간의 2차 관직 생활기로 구분된다.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했지만 당 색이 그리 강하지 않았고,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조정에서 활약하였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학문 분야에서 정조의 측근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서명선은 정치 영역에서 정조의 오른팔이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자연과학과 농학과 실용학 등 민생 중심의 학문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고, 농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았다. 이들 중 농업 현장에서 농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서유구뿐이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학의 한계를 넘어섰다.


서유구는 1차 관직 생활을 마친 후 민생에 도움이 되는 농학의 체계화와 농서 편찬에 뜻을 두고, 갑자기 별세한 아버지가 남긴 해동농서를 마무리하고 계승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실정에 맞는 농서가 절실했다. 조선의 첫 공식 농서는 1429년 세종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농사직설이다. 그 외 1492년 강희맹의 금양잡록, 임진왜란 후 허균의 한정록(1618), 박세당의 색경(1676), 홍만선의 산림경제(1700년 전후),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서명응의 고사신서(1771)본사(1787) 등이 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이유 중 하나는 산림경제(4416)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서유구의 형수인 빙허각 이씨도 가사와 관련된 여성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편찬 중이었는데, 이것도 임원경제지와 상호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유구는 파주 장단에서 아들 서우보 등과 함께 임원경제지를 편찬했다. 18373월에는 가솔들과 함께 번계樊溪에서 지내며 농사 달력을 만들고 이를 전가월령가라는 노래로 만들었다.

 

 

임원경제지속의 음식·요리 백과 집필


임원경제지에서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정조지. 곽미경의 조선 셰프 서유구(2016)는 서유구의 음식 레시피와 삶을 버무려 소설적으로 그렸고, 풍석문화재단음식연구소는 조선 셰프 서유구의 김치 이야기(2018)를 통해 서유구의 김치 요리를 복원하고 설명하였다. 돈까스의 탄생을 쓴 오카다 데쓰는 일본과 서구의 음식문화가 합류하여 60년의 절충을 거쳐 탄생한 것이 돈까스라고 했다. 김치도 오랜 문명 교류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가 등재되었다. 이는 김치의 독창성과 고유한 가치를 세계인과 나누자는 취지일 것이다.


서유구는 금화지비집에서 집안 친척들까지 술과 음식에 대해 논의했을 정도로 음식솜씨가 좋았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어머니는 밥 짓기와 요리를 매우 잘하셨다. 시냇가의 물풀이나 들의 푸성귀도 그 분의 손을 거쳐 데치기만 하면 모두 색다른 맛이 났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릴 수 있다. 생물학자 롭 던Rob Dunn집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2020)에서 어쩌면 김치의 맛은 미생물에 의한 손맛뿐 아니라 한국에는 없는 단어인 집맛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서씨 집안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서해徐嶰(1537~1559)의 부인 고성 이씨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한양에 진출하여 귀한 약과와 약식, 그리고 청주를 만들어 거리에 내다 팔고 아들서성(徐渻, 1558~1631)을 뒷바라지하며 가문을 일으켰다. 이런 음식 솜씨와 수완이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유구는 음식에 관한 남다른 지식을 자랑하였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통해 보여준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농경문화와 음식문화였다. 그는 그 정리를 위해 30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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