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평야의 모습
철원은 넓은 평야를 갖고 있는 곡창지대로 남북 모두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지역이다.
이 철원평야의 동쪽에서 상감령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정전협정 서명의 현장은 판문점이지만 정전협정이 규정한 오늘의 현장은 휴전선이다. 역사는 학술서와 논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도 있다. 그것은 때로 여행지가 되기도 한다. 한 여행객이 50여 일 동안 휴전선 일대를 열 차례 넘게 답사했다. 그가 꼽은 세 곳의 현장과 그곳에 담긴 한국전쟁에 대해 들어본다.
나이 오십 줄부터 역사를 읽어가며 지식과 정보를 쌓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 지식과 정보는 편견과 무지로 뒤범벅된 것이었음을 곧 자각하게 됐다. 말하기가 버겁고 글쓰기가 두려워졌다. 남의 나라 역사는 조금 잘못 안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이 특히 그랬다.
독립운동 역사에 한 걸음 들어가 보니 그것이 한국전쟁과 직결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중국을 다니며 조선인의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 글과 사진으로 정리하는 데 4년여를 보냈다. 이어, 지난 1년간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 국내 여러 곳을 답사했다. 경기도 교동도에서 강원도 고성의 휴전선 일대를 다섯 차례에 걸쳐 36일간,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 등 서해 도서 지역을 세 차례 13일간, 38선만 3일간, 그리고 교동도와 철원·대전 등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답사했다.
비무장지대는 코로나19와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접경 지역에서도 상당히 많은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세 곳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중국영화 ‘상감령’의 포스터
상감령을 아시는가
첫 번째는 저격능선 전투전적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의 남대천을 건너는 김화교 남쪽에 있으며, 탁 트인 곳에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1956년에 제작된 ‘상감령上甘嶺’이라는 중국 영화는 이 김화읍 북쪽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작은 고개 ‘상감령’에서 벌어진 전투를 소재로 한다.
당시 이 지역은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북쪽의 상감령에서 남쪽의 하감령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중심으로 서쪽을 삼각고지, 동쪽을 저격능선이라고 불렀다. 삼각고지는 미군 7사단이, 저격능선은 국군 2사단이 맡아 유엔군 측에서 선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에서 11월 24일까지 계속됐는데 낮에는 공중 폭격과 지상 포격을 앞세운 유엔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밤에는 중국군이 기습하여 그것을 다시 빼앗는, 죽음의 톱질 같은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가 매일 반복됐다. 결국 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서야 국군 2사단에 작전 지역을 인계한 뒤 철수했다. 미국에서는 “한국 전선에서 명분 없는 전쟁으로 미군이 쓰러지고 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이 전쟁에서 양측은 어떤 피해를 보고, 어떤 전과戰果를 거뒀을까. 양측이 각기 집계한 아군 피해를 보면 유엔군 사상자는 7천 명, 중국군 사상자는 1만1,500명이다. 그렇다면 사상자가 적은 유엔군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을까? 여섯 개 중 두 개의 고지를 점령했으니 3분의 1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군 입장에서 삼각고지 전투만 분리해서 보면 세계 최강인 미군을 철수하게 했고, 미국 국내 여론까지 악화시켰으니 완승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전이 끝났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지속하는 한 기억의 전쟁은 이어진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과 주장은 다를 수 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그에 맞는 소재를 선택할 뿐이다. 국가적 자긍심을 부각하기 위해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내세울 것이고, 중국은 상감령 전투를 소환할 것이다. 중국이 상감령 전투를 운위云謂하면, 우리는 삼각고지 전투를 제외하고 저격능선 전투만 강조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전쟁을 6·25동란이나 6·25사변이라고 배웠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으니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강력한 의미다. 각국이 이 전쟁을 칭하는 명칭은 각기 다르다. 미국은 이 전쟁을 군대를 파견한 나라의 국호를 붙여 ‘Korean War’로 부르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며,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전쟁’, ‘Korean War’, ‘조선전쟁’이라는 명칭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한국 자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국군 2사단 피해 : 전사·실종 1,206 + 부상 3,613 = 합 4,819명
• 미군 7사단 피해 : 사상자 2천여 명
• 전과(중국군) : 사살 3,772 + 살상 추정 11,023 + 포로 72 = 합 14,867명
중국 자료 : 해방군보
• 중국군 피해 : 전사 4,838 + 부상 6,691 = 합 11,529명
• 전과(미군 7사단, 국군 2사단) : 살상 총 25,498명
미군과 소련군이 합동으로 만든 낡은 38선 표지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38선이다. 한국전쟁은 38선에서 시작되었고, 휴전선에서의 정전협정으로 교전이 중지되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휴전선을 답사하고 나서야 38선과 휴전선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여행객이 갈 수 있는 38선의 가장 서쪽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마현리이다. 경순왕릉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약 3.6㎞ 지점이다. 경순왕릉의 후방 담장부터가 비무장지대라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커다란 돌에 ‘아! 38선’이라는 문구를 음각한 실물 표지는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453-1에 있다. 도로명 주소는 청정로 188번지길이다. 371번 도로변에 설치돼 있어 찾기도 쉽다.
38선을 좇아 동쪽으로 가면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에서 의미 있는 표지를 마주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38선돌파기념비는 1951년 5월 28일 유엔군이 38선을 세 번째로 돌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군인의 꽃이 되어 이곳을 돌파하다.
1951년 5월 28일, 38선 미 제1기갑사단이
3회째 돌파한다.
공격임무부대 편성
미국 제70탱크대대 제191분견대,
그리스 원정군 1대대, 태국군 제21보병대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이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미국, 그리스, 태국 장병을 기리며 추모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우다.
한탄강 남안에 있는 미군과 소련군이
합동으로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38선 표지
그 옆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표지가 있다. 그런데 안내문이 설명하는 것은 그 표지가 아니라, 옆에 세워진 낡고 오래된 콘크리트 설치물이다. 상단은 잘린 상태로 바닥에 놓여 있고 하단은 제자리에 박혀있다. 이는 미군과 소련군이 1945년에 세운 38선 표지로, 안내문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이 파손된 38선 옛 표지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미국과 옛 소련의 합의 하에 세워진 38선 표지석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 인민군과 탱크를 앞세우고 이 길로 남침하여 수많은 우리 국군과 민간인까지 비참하게 희생되게 했던 피로 물든 6·25전쟁으로 인해 역사적인 이 38선 표지석이 파손되어 있던 중 1991년 9월 17일 당시 군수였던 홍성규 연천군수께서 바로 그 옆에 38선 경계비를 다시 건립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파손된 옛 38선 표지석은 파손된 상태로 기념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2016년 4월
대한민국 6·25참전기념자회 연천지회
38선은 우리가 그은 선이 아니다. 미국과 소련이 논의하고 결정해서 선을 그을 때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두 나라 군대가 합의하여 설치한 표지야말로 역사적 사실과 의미에 가장 부합하지 않겠는가. 답사를 다니며 미군과 소련군이 설치한 38선 표지를 실물로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38선돌파기념비를 찾았다가 그 옆에 있는 진짜 유적을 만난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막혔다. 일제강점기가 세계대전 승전국의 분할 점령기로 치환된 당시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이 파손된 콘크리트 설치물이었다. 지도 위에나 존재하고 측량 기사들이나 인식할 수 있던 북위 38도가 ‘38선’이라는 정치·군사적 분계선이 되자 월남과 월북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그리고 38선 표지가 설치되자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특별한 행위가 되었다.
해방이 아니라 분단으로 시대와 환경이 변하기 전에 이곳을 지나갔다면 금강산까지 가는 여정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탄철교는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금강산에 닿는 철길은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로 연결되어 있다. 먼저 경원선은 용산에서 출발하여 서빙고-왕십리-청량리-창동-의정부-덕정-동두천-전곡-연천-대광리-철원으로 이어진다. 다시 월정리-평강-복계-검불랑-세포-삼방-고산-용지원-석왕사-남산-안변-배화-갈마 그리고 원산이 종착역이다. 낯선 지명들이 적지 않다. 또한, 금강산 전철은 철원에서 분기하여 금강산으로 향한다. 철원-사요-월하-대위-정연-금곡-김화-아심-금성-경파-탄감-창도-현리-화계-단발령-말휘리-내금강이 종착역이다. 역은 모두 28개. 철원에서 김화까지는 남한 지역이고, 그 이후는 북한 지역이다.
한반도 전체 지도를 두고 남북 분단이라는 관념을 누르고 쳐다보면, 금강산으로 분기하는 철원이 배꼽의 위치에 있다. 철도 노선이 표시된 지도를 보면 신의주, 서울, 부산을 잇는 선과 청진, 원산, 서울, 목포를 잇는 선이 X자로 교차한다. 철도만 보면 서울이 중심이지만, 철도를 동맥으로 보고 육지를 몸뚱이라고 상상하면 철원이 허리춤 가운데 배꼽으로 보인다.
1930년대 철도 노선도
경성과 금강산의 중간 지점이 철원으로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금강산 가는 길: 철도와 육로
그런데 금강산 가는 육로가 하나 더 있다. 금강산 전철의 종착역과 가까운 말휘리로 이어지는 도로다. 말휘리는 동서 방향의 금강산 전철과 남북 방향의 도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북으로는 원산으로, 남으로는 양구를 거쳐 춘천으로 이어진다. 내금강에서 외금강 온정리로 가는 길도 말휘리에서 출발한다.
금강산으로 간다는 것은 곧 말휘리로 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로를 이용하여 경성에서 말휘리를 가려면 경성-오리진선을 타야 한다. 이는 경성-양평-춘천-양구를 거쳐 오리진(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에 이르는, 서울과 동해를 연결하는 도로다. 경성에서 오리진선을 타고 출발하여 춘천에서 양구(춘양선 이등도로)로 간 다음에 양구-말휘리 노선(삼등도로)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춘천-양구-말휘리-원산은 이 일대의 교통과 경제와 일상의 축이었다. 양구로 공급되는 물자나 정보는 대부분 원산에서 남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쟁 후에는 완전히 막혀서 춘천과 연결이 강해졌지만.
분단이 모든 것을 삼켰다가 쏟아내자 우리는 많은 것을 상실했다. 불안감과 호전성이 엉켜있는 정전체제 속에서 많은 것이 상처 딱지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춘천-양구-말휘리로 이어진 내금강선도 사라졌다. 춘천-양구 구간은 국도 46호선의 일부가 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는 예전의 지리를 추측하기도 힘들어졌다. 양구-말휘리 구간은 국도 31호선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도로명 주소가 금강산로인 덕분에 원래의 지리-교통 관념을 약간은 일깨워주고 있다.
지난 1월, 휴전선을 답사하는 가운데 31번 국도의 끝까지 가보자는 제의에 모두 흔쾌히 수락했다. 차를 몰아 가보니 31호 국도의 끝은 비득고개(비둘기고개, 구현고개라고도 함)였다. 민통선 검문소가 비득고개 마루에 있었다. 민통선을 통과할 수 없어 그곳에서 내려 사진 몇 장 찍고는 차를 되돌렸다. 나름대로 끝까지 가보았다는 작은 성취감도 있었고, ‘철통같이 막혔다’는 깊은 탄식도 있었다.
비득고개도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이 학살당한 현장의 하나이다. 어느 곳인들 학살이 비켜 갔겠는가. 양구에서는 현재 양구경찰서 뒷산 계곡의 곧은골도 그랬고, 원산으로 가는 길목의 비득고개도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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