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1945년 해방 후 한반도는 정치·사회 모든 면에서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낯선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발생한 재산 및 기타 피해 보상 처리를 최우선 과제로 다루어야 했다. 대일 과거사 처리를 위해 한국 정부가 최초로 작성한 자료는 총 523쪽에 달하는 『대일배상요구조서(이하 『요구조서』)다.
식민 체제 하에 누적된 국민 피해, 해방 후 배상 요구 분출
대일배상요구의 움직임은 1947년 초 한국 금융계에서 시작됐다. 한국 금융계는 일본인과 일본 단체에 대출한 약 61억 2,353만 엔, 조선은행 베이징 지점이 일본군에 대출한 약 424억 엔의 이자 약 2억 3,341만 엔, 만주국 지폐, 화북지역 중국연합준비은행이 발행한 지폐의 통화 보상 요구 등을 합쳐 엔화 198억 2,565만 9,638엔 40전, 상하이 달러 400만 엔, 지금 249톤, 지은 89톤의 반환을 일본에 요구했다. 가격 상승률은 화폐나 물건, 서비스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현재 가격으로는 100조 원이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1947년 11월 27일 국회는 ‘대일 강제노무자 미제 임금 채무 이행 요구’ 및 ‘대일 청장년 사망 배상금 요구’ 청원을 채택했다. 1949년 2월에는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를 『요구조서(제1부 현물반환요구)』로 발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요구조서(속) 제2부 확정 채권, 제3부 중일전쟁 및 태평양 전쟁에 기인한 인적·물적 피해, 제4부 일본 정부 저가 수탈에 의한 피해』를 발행했다. 현물 반환을 제외하고 일본에 요구할 배상금 산출액은 1945년 기준으로 492억 5,428만 8천 엔이었다.
『대일배상요구조서』 중 조선은행 경유 금·은 출량표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조선은행이 매입한 지금(地金)·지은(地銀)
『요구조서』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현물 반환의 첫 항목은 땅에서 채굴한 금과 은을 의미하는 ‘지금’과 ‘지은’이다. 오늘날에도 금은 안전 자산이다. 금본위제金本位制에서 통화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금이었다. 1930년대 세계적 대공황과 일본의 대륙 침략에 따른 비용 확대는 일본 경제를 위태롭게 했다. 일본은 자국의 화폐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에서 금을 끌어모았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조선인에게 금광업을 독려했다. 금광 개발은 붐을 일으켰다. 금을 매입하는 것은 조선은행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매입한 금은 대부분 오사카 조폐국으로 보냈다. 일본은행은 이 금을 담보로 발권했다. 하지만 조선은행은 금이 아닌 일본 은행권을 담보로 발권했다. 조선은행을 통한 금과 은의 반출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금의 양을 249,633,198.61그램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일본이 지금·지은을 일본으로 반출할 때 조선은행에 지급한 지금 대금 563,272,881엔과 지은 대금 2,877,015엔을 반환할 테니, 반출한 지금·지은을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은행의 탈선, 일본 침략전쟁의 총알받이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 지역의 일본 괴뢰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도록 자본금을 두 배로 증액하는 내용의 조선은행법도 개정됐다. 이에 대해 조선은행 총재 쇼다 가즈에勝田主計는 “경우에 따라 (조선은행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비밀을 엄격히 지키고, 정부의 명령에 따라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법률의 개정 취지라고 설명했다.
조선에서 채굴한 은화와 은괴도 조선은행이 매입했고, 조선은행은 이를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에 보냈다. 이 은은 1938년 2월 화북정무위원회라는 괴뢰 조직이 설립한 북중국연합준비은행의 화폐 발행을 위해 출자됐다. 이 출자 역시 조선은행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강요에 의한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은행은 일본의 명령에 따르는 철저한 을이었고, 그들의 대륙 진출을 위한 도구였다. 연합군이 조선은행을 폐쇄 기관으로 지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일회담과 조선은행 재산 처리
일본 대장성 문서에 따르면 패전 후 중국에 있는 은괴 1천 장이 조선은행 다롄大连 지점으로 보내졌다. 패전 후 조선은행 다롄 지점의 자산은 연합군이 몰수했으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후 은화와 은괴를 포함한 조선은행 자산은 다시 일본 정부에 반환되었다. 1952년 당시 잔여 재산은 약 70억 엔이었다. ‘국가 분리’라는 국제법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식민지 조선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한 조선은행의 자산은 당연히 한국의 것이고, 일본 은행권과 국채 등을 대가로 반출한 ‘지금’과 ‘지은’이 통상적인 거래를 넘은 식민지 착취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선은행 자산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도 핵심 쟁점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대장성의 관할 하에 있었고, 조선은행 주주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주장을 거부했다. 일본은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1957년 4월에 조선은행의 잔여 재산으로 일본 부동산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1960년대 일본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한 축을 담당했다.
징벌의 보복 아닌 희생과 회복을 위한 반환
현물 반환은 배상보다 반환에 가깝다. 『요구조서』의 서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한 폭력과 착취로 얼룩진 것이고, 비인도적이며, 비합법적이라는 것이 이미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일 배상 요구의 기본 정신은 징벌을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라, 희생과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이며 이성적 요구’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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