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봉 선생님과 필자의 인연
연변대학에 재직하던 방학봉 선생께서 올해 3월 23일에 별세하셨다. 방 선생님은 조선족으로, 발해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생을 매진하신 분이다. 필자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2년 즈음이었다. 키가 크고 건장하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학자였다. 이후 학계에서 몇 차례 더 뵈었는데, 2018년에는 재단과 연변대 민족연구원이 조선족 원로들의 구술을 정리하는 사업을 하게 되어 연변대 조사팀과 함께 방 선생님 댁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꼿꼿이 앉아, 특유의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채 차분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생애와 발해사를 공부하게 된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고인을 추모하며, 이제 역사의 인물이 되신 방학봉 선생님을 소개하려 한다.
정혜공주를 만나고 발해사를 시작하다
방 선생님은 1930년 음력 11월 6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합신촌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함경북도 갑산인데, 아버지 때 화룡으로 이주하여 귀틀집을 짓고 땅을 일구며 살았다. 1949년 3월 연변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했고 1회 졸업생이다. 대학 1학년 때 돈화 육정산고분군 발굴 조사에 참여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연변대 학부장 최문호 교수와 오봉협 지도교수가 학생 30명을 발굴대로 조직하여, 육정산 아래 조선족 마을 강동촌에서 먹고 자며 산을 타고 넘어 무덤을 발굴하였다. 그때 한 무덤에서 돌사자 두 마리와 비석 하나가 나왔다. 정혜공주 무덤이었다.
이는 방 선생님께 큰 자극을 주어 발해사 연구를 결심하게 했다. 방 선생님은 “발해 유물의 실물과 유지를 접촉하면서 내 마음 가운데 느낀 게 있다. 력사학부에서 배우는 력사에는 동북사도 있고, 중국사, 한국사, 세계사 이런 거가 있다.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느 부분을 공부해야 되나? 세계사를 해야 되냐, 지방사를 해야 되냐 이런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잖겠소? 다른 학문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감촉을 자연히 느끼게 되더라이.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하면은 발해사를 해야 되겠다. 어째서? 그거는 고대사다. 해결하지 못한 역사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를 밝힘으로써 내가 공헌할 게 좀 있을 수 있다. 다른 역사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고 남이 다 해놓은 거를 그저 전달할 뿐이다. 이런 감을 척 가지게 되더라이. 그래서 역사에서도 발해사를 해야 되겠다. 그래가지구 돌아와서 이때까지 발해사하고 씨름했소.”라고 소회를 밝히셨다.
방학봉 선생님이 이룩한 발해사 연구 성과
선생님은 1980~1990년대에 가장 활발히 논문을 발표했고, 2000년대에는 저서로 묶는 일에 치중했다.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의 발해사 연구자 중 가장 다량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발해사연구, 동북민족관계사, 발해문화연구, 발해불교연구, 발해건축연구, 발해성곽, 발해주요교통로연구, 발해행정연구 등 저서만 해도 40여 권을 펴냈다. 한국에서도 편역책을 포함하여 7권 정도 출간했다. 발해 관련 논문은 113편가량 발표했다. 그 양도 놀랍지만 분야도 발해 전 영역에 걸쳐있다. 발해 옛 땅에서 태어나 살며 관련 조사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특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발해 연구의 선구자로 명실상부한 발해사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
발해 유적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어디인지, 혹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발해 유적이 있는지 선생께 여쭤보았다. 그러자 평생 발해사를 연구하도록 결심하게 한 정혜공주 무덤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왕과 정혜공주 무덤 사이에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지가 하나 있는데, 기둥 자리와 온돌 자리가 있어 묘지기의 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정혜공주 무덤 동쪽에서 벽화 조각이 나왔다는데, 자신은 그것을 보지 못해 내용을 정리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방 선생님은 발해의 건국지를 돈화로 보았다. 당나라 추격군을 물리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자리 잡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벌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고, 지세가 맞고, 조건이 좋은 돈화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조영 집단이 처음 은거한 동모산에 산성 겸 도읍을 정한 뒤 차차 형세가 좋아지자 평지로 내려갔는데, 그곳을 오동성으로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학계에서 이 문제로 여러 번 토론하고 따져보니, 후에는 오동성보다 영승유지가 더 유력하다고 보게 되었다. 오동성은 궁성으로서는 너무 작은데 영승유지는 비교적 크고, 유물도 많고, 발해 고분군이 있는 육정산이 북쪽에 있으니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지금도 논의 중이니 좀 더 토론해야 한다며 여지를 남겼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 마반촌산성을 초기 궁성으로 보는 설이 나온 것을 염두에 둔 듯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은 학자
1952년 10월 대학을 졸업하고, 랴오닝성 개원과 연변 1중을 거쳐 훈춘 삼가자에서 1년간 있다가 1957년에 연변대 교수가 되었다. 1958년부터 중국은 대약진 시기로 접어들었는데, 조직 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정혜공주 묘비를 발견했어도 비문을 다 판독하지 못했는데 다른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사서오경을 독학하고 주역을 읽었는데, 주역은 어려워서 혼자 힘으로는 통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공부에 주력한 것, 그리고 1956년 12월에 우파 언론에 입당한 것 때문에 문화대혁명 시기에 큰 고초를 겪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안도현 신압공사 대양구대대로 가족과 함께 하방되었다. 그런데 부인은 함께 가지 못하고 훈춘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방 선생님은 4년 뒤 안도현방직공장으로 옮겼고, 다시 자제중학교로 배치되어 4년간 교원으로 있었다. 그곳에서 성실한 자세로 모범을 보여 나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선진생산자 세 번, 철로보호모범 두 번이었다. 선생님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8년간 이와 같은 파란을 겪은 후, 1978년에 연변대로 복귀해서 연구와 교육에 다시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방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와 만주국 시기에 가난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중국 현대사의 거센 흐름 속에서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발해사라는 미지의 학문 분야를 개척하며 평생을 연구에 매진했다. 선생님은 발해가 독립적인 나라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발해 유적 조사와 연구에 집중해서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중국과 우리나라 양국에서 활동했던 방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발해사 연구가 더 활기를 띠기를 기원한다. 다시 한번 방학봉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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