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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뒷담화
중국으로 간 한국 문화 송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청자
  • 이유표, 재단 북방사연구소 연구위원


국보 제97호 청자 음각 연화당초문 매병(靑磁 陰刻蓮花唐草文 梅甁)

ⓒ국립중앙박물관



1998년 중국 천진天津 세관에서는 문화재를 밀반출하려던 일당이 검거된 바 있는데 여기서 주목을 끌었던 것은 이 가운데 고려청자가 무려 40여 점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수량은 당시 상해박물관上海博物館에 소장된 고려자기(고려청자 포함)30여 점에 불과했다는 점과 비교해본다면 실로 놀랄만한 숫자다. 게다가 순청자와 상감청자 등 예술적 가치가 높은 청자도 포함되어 있어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는 현재도 중국에서 고려청자가 얼마나 가치 있는 문물인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비색 천하제일: 고려청자의 발전

고려청자는 대략 10세기경, 중국 월요越窯를 대표로 하는 남방의 자기 제작 기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대표적인 고려청자는 햇무리굽玉璧底 청자와 녹청자綠靑磁라고 일컫는 조질 청자다. 청자는 11세기에 이르러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 태토와 유약, 그리고 조형과 문양 등에서 점차 중국 월요, 요주요耀州窯, 정요定窯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고려만의 독특한 특색을 성숙시켜 나갔다. 특히, 이 시기부터 고려청자는 특유의 비색翡色으로 세련미를 더하면서 12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12세기 전반기의 고려청자는 유약과 태토 모두 차원을 높여 한층 정치해졌고, 은은한 비색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예리한 기품이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유연한 선을 지닌 형태를 갖춘 순청자純靑磁의 절정 시대를 구가하였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려청자는 상감象嵌기법과 상감시문이 본격화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상감 기법은 그릇의 표면에 도구를 이용해서 문양을 새긴 후, 그곳에 흰색과 붉은색 등의 흙으로 채워 문양의 사실적인 느낌과 생동감이 느껴지게 하는 고도의 시문 기법이다. 이는 12세기 중반부터 몽골의 간섭이 본격화되는 13세기 초까지, 고려청자가 상감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비록 상감 기법에 빛이 바라기는 했으나, 다른 청자 기법 또한 발전하여 동화청자銅畵靑磁, 철화청자鐵畵靑磁, 철채鐵彩, 연리문練理文 등도 세련미를 더해갔고, 화금자기畵金瓷器와 철유鐵釉, 흑유黑釉 등도 절정을 이루었다.

 

 


2012년 중국 내몽고 집녕로(集寧路) 고성 유적에서 발견된 청자 연적

 

 

중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려청자

고려청자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금세 이웃 나라의 동경과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송대 서긍徐兢은 고려에 출사한 후 돌아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 송대 태평노인太平老人천하제일을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건주建州의 차, 의 비단, 정요의 백자, 절강浙江의 칠기고려의 비색, 흥화군興化軍의 자어子魚, 복건福建의 예안荔眼, 모두 천하제일로 다른 곳에서 모방하려 해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태평노인, 수중금袖中錦

 

 

건주의 차, 촉의 비단, 정요의 백자, 절강의 칠기 등과 함께 다른 곳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천하제일이라는 찬사를 고려의 비색청자에 아끼지 않은 것이다. 특히, 당시는 중국 여관요汝官窯의 청자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는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천하제일의 고려청자는 지금도 많은 고고 발굴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대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일대와 당시 한·중 교류의 핵심 지대인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요녕성遼寧省 일대는 물론, 지금의 북경北京, 하북성河北省, 길림성吉林省, 내몽고內蒙古 등지에서도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비록 국내에서 발견되는 수량에 비하면 소량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중국에서 희소성을 갖춘 고귀한 물품이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또 발견된 고려청자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당시 천하제일이라는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음을 증명해 준다.



 


1994년 중국 하북성 석가장(石家莊) 원나라 시기 사씨 묘지(史氏墓地) M1에서 출토된 상감청자

 

 

우리의 영원한 노스탤지어, 고려청자

그러나 찬란했던 고려청자는 몽골의 간섭이 본격화되는 13세기 초반부터 고려가 멸망하는 14세기 후반까지 태토, 유약, 기형器形 등 제 방면에서 점차 쇠퇴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로 인해 고려 후기에 이르러 그릇은 둔하고 무겁게 변했고, 비색은 점차 갈색과 황색으로 변했으며, 태토 또한 점차 거칠어져 천하제일의 비색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 때문인가? 화려하지만 결코 속되지 않은 고려의 비색은 고려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이자 우리나라의 문화 정신으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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