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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영어권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와 초국적 기억
  • 김은경, 한성대학교 상상력교양대학 교수


1996년 제52차 UN인권위원회에 제출된 일본군 ‘위안부’ 조사 보고서(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군대 성노예제로 규정하여 국제사회의 공론 형성에 기여하였다.

출처: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아카이브814



영어권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

2021년 초 이른바 램지어 사태로 많은 논란이 야기되었다. 그의 논문의 결점을 지적하는 기고문과 논문이 지속해서 발표되었고 이는 국제적인 학문 연대로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역사)학계가 영어권 연구에 무관심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일본군위안부연구를 주도해 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위안부가 글로벌 지평에서 논의되는 만큼 그것을 둘러싼 초국적 지식장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초국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글로벌-로컬의 위계를 해체하고, 한국과 일본의 내셔널리즘 의제로 제한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는 1992년 무렵부터 위안부문제를 알리는 기고문이 각종 학술지에 등장했고, 1990년대 중후반 유엔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된 뒤 국제적인 관심과 중요성이 커졌다. 1990년대부터 2020년까지 영문으로 발표된 위안부연구는 학술논문, 학위논문, 단행본 등을 포함해 450건이 넘는다. 특히 최근 5년 사이에 연구 편수가 170여 건으로 급증했다. 이는 위안부동상 설치와 한일 외교 분쟁이 격화된 시점과 맞물린다. 이런 이슈들이 동북아의 지역 안보 문제이자 동상이 설립된 자국의 문제로 인식되어 세계 언론과 학자들의 관심을 추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메리스 공원에 설치된 ‘위안부’ 기림비. 

해외 기념비 설치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쟁이 급증했다.

ⓒ연합뉴스


 

글로벌 기억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캐럴 글럭은 위안부상징 권력을 가진 글로벌 희생자로 보편화된 순간 그 문제는 일본이나 아시아인의 손을 떠난 것이라고 했고, 마가렛 스테츠Margaret D. Stetz는 미국 대학에서 위안부 연구가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전망했다. 이들의 주장은 위안부피해의 역사가 국제사회의 인정 체계 안으로 편입돼 글로벌 기억 장소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강현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위치에서 여성 억압이나 젠더화된 피해의 아시아화Asianization’가 학계와 초국가적 기구, NGO를 통해 공식화돼 유포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위안부피해가 보편 세계인 글로벌 층위로 수렴될 때 소거되는 로컬리티와 재생되는 타자화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위안부이슈가 글로벌 공간으로 이동하며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위안부를 희생자화하려는 동아시아 각국의 경쟁적 태도다. 아시아-태평양 저널: 재팬 포커스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20213월 일본군위안부특집호 서문에 홀로코스트를 민족 서사와 연관시키려는 동아시아의 희생자 경쟁은 병리학적 징후라고 비판했다. 이는 위안부피해가 홀로코스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경쟁 속에서 위안부역사가 단순화되고 다크 투어리즘으로 상품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초국적 지식장과 글로벌 기억 공간에서는 특정 국가나 집단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위안부역사상이 고정되지 않고 세계의 젠더·인종·계급 문제와 결합해 재탄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복수複數의 기억으로 다시 주조되는 위안부역사는 각지의 로컬 역사와 만나고 미래 기억과 얽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상호 소통 과정은 다방향적 기억 환경을 만들고 기억의 탈중심화를 촉진한다. 이것이 한국 학계에 제기하는 과제는 결코 적지 않다.


 

영어권 연구의 특징과 향후 과제

향후 연구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 사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어권의 위안부연구자는 동아시아학-일본학 전공자의 비중이 높아 한국계 외에 한국 자료와 연구 성과를 참고하는 경우가 드물다.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지식이 일본을 경유해 영어권에 소개되고, 인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현실은 지식 생산 구조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특히 위안부제도의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한국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는 큰 고민거리다. 하지만 이를 민족주의적 헤게모니 싸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계 각지의 탈식민 이슈와의 연대를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소수 역사수정주의 출판물을 제외하면 위안부제도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 지형에서 강제 vs. 자발’, ‘성노예 vs. 매춘부의 구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초국적 지식장에서 성노예론은 합의된 지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강제 노동이나 강제 매춘을 성노예와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 연구가 많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개념에 기초해 위안부피해를 협소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셋째, 많은 연구에서 전후 여성들을 침묵하게 만든 이유로 한국의 가부장제를 지목했다. 일부는 이를 문화적 차이로 환원하는 서술 태도를 보였다. 문제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내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데 반해, 영어권에서는 근대화되지 못한 아시아적 특성이나 한국의 유교 전통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접근은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주의를 재생산한다. 여성들의 침묵은 전후 냉전체제, 미군 기지촌과 군사화, 가부장제적 성문화와 성 착취 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넷째, 영어권 학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역사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전시 성폭력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연합군의 성폭력, 전후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성 착취를 같은 맥락에서 검토한다. 이는 무엇이 여성에 대한 폭력인지, 무엇이 여성을 예속화하고 노예화하는지에 대해 폭넓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그동안 당연시해온 패러다임에 의문을 던지고 재논의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위안부경험을 초국적 역사의 반열에 올려두고 여성 인권이라는 이상적 렌즈로 보는 것도 토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초국적 이상이 강조되는 가운데 로컬리티를 삭제하고 소수자를 주변화하는 것은 가장 우려되는 문제다. 서구 1세계중심의 인권 패러다임은 위안부역사를 보편화하여 초국적 기억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시아’ ‘여성의 타자화로 기능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서구적 보편성, 이성애적 정상 규범, 국민국가시스템에 기초해 형성된 인권 담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작업은 향후 초국적 지식장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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