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자료총서-한국사료 편』
이 책에는 고려·조선시기의 정사·논설·야담·시문집 등
선인들의 발해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42종의 한국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흩어진 기록 모으기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여 고구려의 1.5배에서 2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제3대 문왕 때에는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였다.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수레와 글이 본래 일가를 이룬다(車書本一家)’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렇게 국력과 문화 면에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지만,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발해는 수수께끼의 역사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발해의 기록은 여러 이유로 사라졌지만, 연구자들은 주변국이 남긴 간접 기록물을 통해 발해사 복원 노력을 계속해 왔다. 특히 송기호 교수의 『규장각 소장 발해사 자료』(2004)는 발해 관련 한국 사료를 한자리에 모아 우리 선조의 시각에서 발해사를 연구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재단의 전신인 고구려연구재단은 이를 기반으로 유득공의 『발해고』 1종을 더하여 『발해사 자료집(상)』(2004)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최근 재단은 『발해사 자료집(상)』의 원문과 해제를 보완하고 역주를 더한 『발해사 자료총서-한국사료 편』 총 2권을 출판하였다.
발해사를 바라보는 두 시각
발해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과 중국이 크게 대별된다. 한국은 한국사 체계에서 발해사를 보는 반면, 중국은 당나라의 지방 정권으로 본다. 원인은 오늘날의 국가관·민족관·역사관의 차이에 있지만,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의 종족 계통과 발해국 자체의 성격에 대해 달리 기술했던 전근대 역사 기록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대표적 사료인 『구당서』는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발해를 보는 입장에서는 전자를, 한국사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려는 입장에서는 후자를 강조한다. 그러나 전통 시대의 중국 사료는 발해를 중국사와 구별하였고, 대조영과 발해 건국을 고구려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료에서도 발해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발해와 동시기에 살았던 신라인 최치원은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고구려에 붙어있던 보잘 것 없는 속말말갈’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양면적인 인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신라인의 발해 인식은 발해 사회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原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포함한 다종족 국가였다는 점과 건국자인 대조영이 속말말갈계 고구려 옛 장수였다는 것, 발해 건국 이후 신라와의 현실 외교와 정치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동역사속』
발해경부도
배제에서 내재로, 인식의 전환
남북국시대가 끝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발해에 대한 두 가지 인식은 계속되었다. 고려의 경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고, 발해 유민들이 많이 귀부하였기 때문에 발해에 대해 비교적 친근함을 보인다. 『고려사』에 보이는 만부교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며, 『제왕운기』는 처음으로 한국사 체계에 발해를 포함시켰다. 고려 중기의 윤언이는 인종에게 ‘칭제건원’을 청하며 연호를 사용한 예로 신라와 함께 발해를 언급하였고, 이색은 「해주」라는 시에서 ‘발해의 유풍遺風’이 사라짐을 아쉬워하였으며, 정몽주는 「발해고성」에서 발해 멸망을 슬퍼하면서 그 유민들이 고려에 아직까지도 살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으로 넘어 오며 『동국통감』이 한국사 체계의 전범典範이 되면서 발해는 한때 한국사에서 배제되고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동국통감』식 발해사 인식을 수정·극복해 갔다. 특히, 1712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은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증적 연구를 자극하였다. 『강계고』에서는 대씨가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고, 당나라 등주 자사를 죽임으로써 전왕前王 즉 고구려왕의 치욕을 설욕했다고 하는 등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가임을 분명히 하였다.
『동사』 단계에서는 발해를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세가世家로 다루었고, 고구려 고토 회복 의식에서 더 나아가 발해 고토 회복 의식을 표명한다. 『동사세가』, 『해동역사』, 『해동역사속』 등도 발해를 신라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지리 고증도 발전하여 『강역고』와 『해동역사속』은 발해의 지리 비정을 현재의 통설과 거의 비슷하게 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발해고』에 이르러 발해가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을 이루었다는 남북국시대론의 토대를 완성하였다.
발해사, 한국 사료로 다시 읽기
한국 사료에는 발해사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732년 발해의 당 등주 공격을 계기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이야기, 발해의 남진에 대비하여 북경 지역에 축성을 한 기록, 발해를 북국으로 부르며 신라도를 통해 왕래했던 사실 등이 나온다. 『고려사』에는 고려로 귀부한 수많은 발해인의 이름과 정안국·후발해·올야·대발해 등 발해 부흥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정보들이 있다.
한·중 간 발해의 역사 귀속 논쟁과 관련하여 한국 사료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발해사 연구에 있어 중국은 조선보다 지리 고증이 늦었고, 근대 이후에야 일본의 침략과 만선사에 대응하여 발해사를 동북사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신중국 수립 이후 주류 인식은 아니었고, 개혁개방 이후 발해사를 중국의 지방사 내지 소수민족 지방 정권으로 정립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료는 발해사를 바라보는 두 시각이 신라 때부터 있었지만, 중국사와는 구분되는 동사東史 또는 동국사東國史의 범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인식 전환을 거치며 발해를 신라와 동등한 남북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적어도 중국보다 수 세기 먼저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발해사 자료총서-한국사료편』은 수수께끼의 역사로 여겨졌던 발해사를 우리의 사료로 읽고 이해하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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