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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가다
요동(遼東)지역 고구려 산성
  • 이성제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요동은 현재 중국 동북지방의 요령성(遼省)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만주(滿洲)라는 용어로 설명하면 남만주 정도에 해당한다. 이 지역을 고구려가 차지하게 된 것은 5세기 초의 일이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요동 일대를 순수하여 새로 정복한 영토를 돌아보았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와 그 뒤를 이은 왕들이 새로운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시행했을 여러 조치들은 잘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요동 각지에 성곽을 쌓아 통치의 거점과 방어시설로 이용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고구려 성은 그 자체로써 고구려사의 여러 장면을 박제된 상태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부 방어의 최전선 - 요동

 

요동반도의 남단, 과거 러일전쟁의 격전지 여순(旅順)으로부터 동북지방 최대 도시인 심양(瀋陽)에 이르는 경로에는 금주(金州), 보란점(普蘭店), 개주(蓋州), 해성(海城), 요양(遼陽)이 있다. 이들은 서쪽에서 요하를 건너오면 맞닥뜨리게 되는 도시이거나 요동반도로 상륙하기 위해 배를 대야 하는 곳에 해당한다. 고구려 성곽이 들어선 곳은 예외없이 이런 곳들이었고, 남아 있는 장대한 성벽들은 서부 방어의 최전선이었음을 엿보게 해준다.


요령성 대련시(大連市) 금주구(金州區) 대흑산(大黑山)에는 둘레길이 5km에 이르는 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명칭은 대흑산산성 또는 대화상산성(大和尙山城)인데, 고구려 당시의 이름은 비사성(卑奢城)이다. , 당이 고구려를 침공해 올 때 수로군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요동반도를 따라 동진하는 경로를 이용했다. 이러한 경로에서 관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 비사성이다. ‘(성의) 네면은 경사가 급하고 서문(西門)으로만 오를 수 있다는 사서기록처럼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여 있다. 산성에서는 발해만(渤海灣)과 황해(黃海) 방면 모두를 굽어볼 수 있어, 요동반도 연안로를 이용한 해상 교통을 장악하는 최적의 요새였다. 645년의 대당전쟁에서는 당군의 야간 기습으로 성이 함락되고 8,000여 명의 고구려인이 포로가 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천리장성(千里長城)의 흔적 -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과 마권자산성(馬卷子山城)

 

금주에서 북상하여 와방점시(瓦房店市)를 지나다보면 경로의 서쪽 편으로 용담산(龍潭山)이 보인다. 득리사산성이 자리잡은 곳이다. 성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성벽이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용담으로 불리는 대형 저수지를 만날 수 있다. 저수지의 벽체는 돌로 쌓아올렸는데, 이는 고구려 산성의 부속시설로 장하(庄河) 성산산성(城山山城길림(吉林) 용담산성(龍潭山城) 등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그 곁에는 도교사원이 들어서 있는데, 성 안에서 가장 평탄한 지대로 고구려 당시에도 주요 건물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길을 따라 오르면 서문에 이른다. 남쪽 봉우리에서 내려온 성벽이 안으로 들어오고 북쪽의 성벽이 바깥으로 에워싸고 있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득리사산성 서벽과 옹성



한편 득리사산성의 동쪽, 와방점-개주 간 도로 건너편으로 마권자산성이 있다. 입지조건으로 보아 득리사산성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요동반도 남부의 장하 성산산성과 후성산산성(後城山山城)에서도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후성산산성 동벽에서 성벽을 쌓다가 마치지 못한 채 남겨진 듯한 모습이 몇 군데에서 보인다는 점이다. 서둘러 공사를 진행했던 연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631년 고구려는 당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천리장성의 실체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나 원래 있던 산성에 더해 그 곁에 성곽을 추가로 쌓았다는 것은 16년이란 긴 세월동안 거국적인 공력을 들였다고 하는 이 대공사와 관련이 있을성 싶다.

    


다양한 축조방식 - 건안성(建安城)

    

고구려 성이라 하면 석축의 성곽을 쉽게 떠올리지만, 고구려인들은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토석혼축, 고운 흙을 다져올린 판축도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성벽 축조의 다양한 방식을 한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건안성, 현재의 고려성자산성(高麗城子山城)이다. 와방점시의 북쪽 개주시에서 대석교(大石橋)에 이르는 경로 동쪽으로, 청석령향(靑石嶺鄕) 고려성자촌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성자촌을 중심으로 주위를 에워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서 문지의 주변은 판축으로, 여기에서 이어지는 성벽들이 구간에 따라 토석혼축과 석축 등 여러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당사(唐使) 진대덕(陳大德)이 남긴 고려기(高麗記)에는 평곽성(平郭城)은 지금 건안성이라 부른다. 이전 한의 평곽현이라는 내용으로, 양자가 동일한 곳인양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평곽현은 개주시에서 발견된 한대(漢代) 고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는 평곽의 군현성과는 별도로 새로 산성을 쌓아, 지역 지배와 방어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하면서 기존의 평지성을 그대로 이용하는 대신 산성을 새로 쌓아 거점으로 삼는 고구려 특유의 방식으로 재편했음은 무순(撫順) 고이산성(高爾山城)과 현도성(玄城)의 조합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를 지키는 보루 - 요동의 방어선

    

고구려인은 방어선의 전면에 세워진 성곽과는 별도로 그 배후에도 성을 쌓아 겹겹이 방어망을 구축했다. 등탑시(燈塔市) 서대요향(西大鄕) 성문구촌(城門溝村)의 북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에는 백암성(白巖城)이 자리잡고 있다. 둘레길이는 2km 정도로 안팎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석벽이 동·서벽과 북쪽 구간에 잘 남아 있다. 성벽과 함께 백암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치(). 5곳의 치가 알려져 있고 이 가운데 3곳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치와 치 사이의 중간 지점에는 성벽 안쪽으로 석대(石臺)3곳 쌓았다. 성벽을 오르는 계단을 시설하는 한편, 성벽을 떠받치는 기능도 했다고 보인다. 발굴 조사 결과 서벽 안쪽으로 석축의 저수고가 확인되기도 했다. 백암성은 요동성(遼東城)의 배후 거점으로 마련됐으나, 645년 전쟁에서는 그 역할을 다하진 못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동성의 함락에 겁먹은 성주가 당군에 내응했고, 이로 인해 오골성(烏骨城) 등에서 달려왔던 구원군을 포함 1만여 명의 남녀가 포로가 됐던 것이다.




백암성 서벽과 치



곧이어 벌어진 주필산(駐山)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또다시 패했고, 당 태종(太宗)의 상승(常勝) 전설은 재현될 듯 보였다. 그러던 당군의 기세를 가로막은 곳은 안시성(安市城)이었다. 안시성민의 분투로 당 태종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늘 승리를 거뒀던 그였지만 요동의 방어선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요동의 고구려 성곽은 고구려를 지키는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부흥군을 일으켜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곳도 요동의 고구려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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