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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던 시절의 이야기 - NARA에 수장된 ‘Korean War’ 이미지들
  • 박도 소설가


1950. 7. 29. 경북 영덕, 피란민 한 가족이 포화에 쫓겨 뜀박질을 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나는 200422, 미국 워싱턴 D.C.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숲 속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n War’ 파일을 들치다가 전율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6.25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19506.25 전쟁이 일어날 당시 여섯 살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 피란지 토굴에서 전투기 굉음과 폭격소리,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를 들으며 공포 속에 지냈다. 산길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신들, 미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내 기억 속에 악몽처럼 남았다. 나는 NARA에 수장된 사진들을 보자 그때의 희미한 장면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피란지 산야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신 더미들, 쌕쌕이(미 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피란민, 파괴된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지고 건너는 피난민,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역에서 남행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란민.


그 순간 나는 이 사진 이미지들을 모두 가져다가 6.25 전쟁의 참상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이 허용되기에 동행한 재미동포 박유종(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막냇손자)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수십만 컷의 사진자료를 들춰 보면서 그 가운데 일부를 선별 입수해 왔다. 귀국 후 2004625일 전쟁기념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독자들의 성원도 매우 컸다. 나는 과분한 성원에 NARA에서 미처 들춰 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이후 제2(200511), 3(20072), 4(201710) 모두 세 차례나 더 방미해 그곳에서 80여 일 머물면서 2천여 점 한국현대사(주로 6.25 전쟁 관련 자료) 사진들을 입수한 뒤 귀국했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 100장면을 선별해 몸소 전쟁을 겪은 원로 문인 김원일·문순태·이호철·전상국 선생의 생생한 체험담을 담아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눈빛출판사, 2017) 을 펴냈다. 그러자 당시의 일들이 마치 비단 위에 꽃수를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는 듯, 들리는 듯했다.

 

 


1951. 5. 28. 소년들이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

김원일


8월에 접어들자 야간 공습이 특히 심했다어둠이 내리면 일체 불을 밝힐 수 없고창문을 가릴 수도 없었다저녁밥도 해지기 전에 지어서 먹어 치워야 했다밤에는 미군 정찰기가 서울 하늘을 점령했다민청에서 집집마다 나누어 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방 벽에 붙여놓아야 했는데밤에는 정찰기에서 내쏘는 탐조등 불빛이 그 초상화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어느 날 밤가까이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 함석지붕 위까지 날아온 돌조각이 쏟아졌는데이튿날 나가보니 있던 집은 간데없고 큰 웅덩이가 패어 있었다이웃사람들 말이그동안 징집을 피해 숨어 있던 장정이 피란길에 나서기 전에 밥을 지어먹다 그 불빛이 비행기에 들켜 포탄을 맞았다고 했다.


 

 


한국전쟁 속의 희비극

이호철


능선 아래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전사자의 시신을 묻으려고 할 때에 마침 주먹밥을 담은 탄약상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조금 전에 취사반에 배치했던 그 늙은 병사가 올라오고 있었다혹여나 싶어 여보이 전사자 중에 당신 아는 사람 있나 보오하자늙은 신병은 대번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분대장님 제 아들입니다이놈 우리 집 5대 독자였는데아이고우리 집은 이제 우짜노하는데고지 아래서는 또 한 무더기 신병들이 올라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내가 겪은 6.25 전쟁

전상국


그해(1951) 1월은 강원도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그야말로 민족의 대 이동이 그 눈길 위에 길게 이어졌다우리 가족도 부엌 바닥에 세간을 대충 묻고 피란민 대열에 끼었다눈길 속의 피란길은 하루 이십 리 이상을 걷지 못했다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배가 고팠다배고픔은 전쟁의 또 다른 공포였다겨울 피란, 1·4후퇴 당시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남쪽을 향한 그 도도한 흐름을 이룬 피란민 대열 속에서 나는 춥고 배고파 울었다.


 

 

1950.9. 한 남정네가 병중의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고 있다.    


  

피란길에 총을 맞은 복실 이야기

 

나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섯 살이었다. 경북 구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북쪽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피란민의 행렬과 쿵쿵쏘아대는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허겁지겁 피란봇짐을 쌌다. 첫째, 둘째 고모네도 바로 이웃에 살았기에 같이 떠났다. 우리 가족도 다른 피란민들처럼 가재도구를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낙동강을 건너고자 남쪽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낙동강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가로막았다.


남조선 인민들, 미제 쌕쌕이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바로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광평동 사과밭을 지날 무렵 미군 쌕쌕이 공습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피란민들은 가재도구를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어른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마치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콩밭에 납작 엎드려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미군 전투기의 무서움은 전혀 모른 채 그 제트기의 폭격 장면을 보려고 콩밭에서 일어나다가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쥐어 박혔다. 한 삼십 분 정도 요란한 공습이 끝나자 여기저기 피란민 시신들이 즐비했다. 다행히도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 숨어서 무사했다. 우리 가족은 소달구지와 가재도구를 다시 챙기고는 금오산 오른편 골짜기인 선기동 윗마을인 자갈터로 갔다. 하지만 워낙 많은 피란민들이 그 마을에 몰려 이미 빈 방들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선기동 냇가에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열다섯 식구 가운데 아이들은 절반이었고, 내 또래가 셋이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피란이 뭔지도 모른 채, 마치 소풍을 나온 듯 낮이면 시냇가에서 피라미를 잡거나 감자를 구워 먹는 등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솔개 소리에 놀란 병아리처럼 잽싸게 토굴 속으로 달려가 머리를 벽에 처박고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미 B-29 폭격기들은 폭탄을 잔뜩 싣고 와서는 마치 염소가 똥 누는 것처럼 아무데나 폭탄을 마구 쏟았다. 그게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1954.2.16. 당시 최고 배우인 마릴린 먼로가 위문공연을 하기 위해 무대로 나오고 있다.



피란지에서 밤이 되면 늑대 울음소리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 무렵은 늑대나 여우들이 산야에 득시글거려 밤이 되면 아이들을 한가운데 몰아 자게 한 뒤 어른들은 불침번을 섰다. 늑대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밤이면 총을 든 보안대들이 피란민 잠자리로 찾아와 전지불로 사람의 얼굴을 비추면서 군인이나 경찰이 숨어 있는지 살폈다. 어느 하룻밤 그들이 우리 가족의 피란지로 접근하자 피란길에 같이 따라나선 둘째 고모네 개(복실)가 마구 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깨갱!”복실은 그 비명과 함께 어둠 속에 사라졌다. 그런데 이튿날 한밤중에 복실은 다리를 절름절름 절면서 우리 가족 피란처 잠자리로 찾아왔다. 우리 가족은 반가워 낑낑거리는 복실을 번갈아 안아주었다. 그의 뒷다리는 총알이 스쳐간 듯 피로 엉겨 있었다. 고모는 이불호청을 찢어 복실의 뒷다리 상처를 감아주면서 말했다.


아이고, 우리 복실아! 찾아줘서 고맙다.”


그러자 복실은 꼬리를 마구 흔들고는 계속 낑낑거리면서 고모에게 안겼다.



6.25 전쟁 비망록

 

나는 방미 기간 동안 가장 먼저 NARA에 출근하고, 가장 늦은 시간에 퇴근했다. 그러면서 하루에도 수천 장의 한국 관련 자료를 검색 수집했다. 또한, 두 차례나 버지니아 주 남쪽 노퍽의 맥아더기념관에 들러 그곳 자료실의 사진도 수집했다. 거기에 소장된 자료들을 들출 때마다 수십 년 묵은 먼지를 마시는 고통도 있었지만, 지난 역사의 진실을 되새기는 기쁨도 있었다.


15~16세 애송이 북한군 포로가 심문당하는 장면은 교실에서 장난을 치다가 교무실로 불려 와서 담임선생에게 야단맞는 개구쟁이처럼 보였고, 포로수용소 천막 막사 앞에서 유엔군 포로감시병이 분무기로 이를 박멸하고자 포로들의 온몸에 DDT를 뿌리는 장면은 <믿거나 말거나>라는 TV프로를 보는 듯했다. 단발머리 앳된 소녀가 ‘PW’라고 쓴 낡은 군복을 입은 채 천막막사 앞에 서 있는 모습도 있었다.




1953.2.19. 전쟁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국군, 인민군, 유엔군, 중국군 가릴 것 없이 전사자들은 하나같이 가을 낙엽처럼 산야에 나뒹굴었고, 전주·진주·대전·함흥 등지의 끔찍한 민간인 학살 사진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철사로 꽁꽁 묶인 시신 사진을 볼 때는 묵념을 드렸다. 이런 참혹한 학살 사진들은 대부분 캡션에 가해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 이런 학살에는 양 진영 모두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전쟁은 멀쩡한 사람도 야수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시신들의 영혼은 아직도 구천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사진 더미 속에는 이따금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전란으로 교실이 불타버려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는 한 소녀가 동생을 무릎에 앉힌 채 공부하는 장면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처마 아래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하는 장면, 전란 중에도 설날을 맞아 한복으로 예쁘게 설빔을 차려입은 소녀들이 동네 마당에서 널뛰기를 하는 장면들이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남루한 차림이지만 그 밝은 표정과 해맑은 미소는 전란을 겪는 아이들 같지 않았다.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왔기에 전후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새삼 우리 겨레의 강인한 저력을 확인케 하는 사진들이었다. 내가 본 사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한 남정네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는 장면으로 아름다운 부부애의 극치였다. 그 사진을 찾고는 그 성스러움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장의 사진은 역사의 물줄기를 틀기도 한다. 내가 NARA에서 수집해 온 사진들이 6.25 전쟁 비망록으로, 또한 조국이 평화통일의 길로 가는데 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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