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현-이카이노- 일본속 작은 제주
“2만 명 가까이 모여 있는 이곳 사람들은 고베, 교토 지역의 조선인들에게도 유명하다. 이곳은 2년 전부터는 한 사람, 두 사람씩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그들의 애호식품을 팔기 시작해, 지금은 매일 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는 번창한 공간이 되었다.” 이 글은 일본에서 1930년대 간행된 『아사히클럽(朝日クラブ)』에 실린 기사다. 이카이노에 대한 1933년의 모습, 조선사람의 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이곳에 조선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히라노 강(平野川) 개수공사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쓰루하시경지정리조합(鶴橋耕地整理組合)에 의해 1919년 3월에 시작돼 1923년에 완성됐다. 규모는 연장 2,144미터, 폭 16미터였다. 1923년에는 이 지역의 인구 증가 현상이 나타났다. 이곳에는 이 공사에 참가한 노동자들과 각종 공장의 직공이 이주해 함께 살아갔다. 그들은 정착 초기에는 이곳에 판자와 흙을 모아서 마치 돼지우리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이카이노의 조선촌에는 1928년 162호, 1,577명이 거주했다. 오래된 나가야(長屋)를 빌려서 조선촌을 형성했다. 1930년대를 포함한 13년 동안 40% 이상이 조선사람이었다.
이카이노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大阪府大阪市東成), 이쿠노구(生野)와 히라노구(平野) 구 하도우기시(河道右岸)의 지역이다. 1973년 현행 주소 표기의 실시 전에는 이카이노오도리(猪飼野大通)・이카이노니시(猪飼野西)・이카이노우치(猪飼野中)・이카이노히가시(猪飼野東)라는 지역 이름이 있었다. 현재의 히가시나리구 타마즈(東成玉津)·오이마리니시(大今里西)의 일부, 이쿠노구 나카가와니시(生野中川西)의 전역 및 쓰루하시(鶴橋)·모모타니(桃谷)·가쓰야마기타(勝山北)·가쓰야마미나미(勝山南)·샤리지(利寺)·나카가와(中川)·다지마(田島)의 일부에 해당한다. 오사카의 히가시나리구(東成)는 1932년 아사히구(旭)가 독립한 후에 북쪽 지역은 나카모토경찰서(中本警察署), 남쪽 지역은 쓰루하시경찰서(鶴橋警察署)가 관할했다. 특히, 쓰루하시경찰서가 관할하는 지역은 1943년에 독립해서 이쿠노구가 되었다. 그리고 전후에 다쓰미초(巽町)가 편입돼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됐다.
현재 이쿠노의 히라노 강
니시슌토쿠 지조(西俊徳地蔵)[이쿠노구 가쓰야마기타 4초메(生野区勝山北4丁目)]. 왼쪽 일방통행 표지판이 있는 도로 부분에 한 때 구 히라노강(旧平野川)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 고대사에서 보면 인덕(仁德) 천황의 시대에 많은 도래인(渡來人)이 왔다. 도래인이 돼지를 길들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이노이노’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또한 문헌상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가 이곳을 흐르는 ‘백제강(百川)’(현재 히라노 강)에 놓여있었다. 그 후 에도시대(江時代)에는 쓰루노하시(つるのはし)라고 했다.
지금의 쓰루하시(鶴橋)의 기원이다.
현재는 이 일대에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이카이노에 조선인이 정주하게 된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소영세기업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이라 해도 건강한 육체만 갖고 있으면 일자리를 찾기 쉬웠다. 둘째, 조선인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이 지역의 주택은 저습지대로 밭을 메워 지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도로가 진흙탕이 되고, 비가 많이 내리면 침수하는 등 악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이 집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집주인들은 할 수 없이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었다.
일할 장소와 잠자리가 확보되고 나면 먹거리에 대한 해결이 시급한 문제다. 의복과 주거는 금방 적응한다 하더라도, 적응하기 힘든 가장 보수적인 것은 역시 음식이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베인 식생활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카이노에 있었던 조선시장은 초기에는 공설시장(公設市場)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 처음 여기에 시장이 섰을 때, 경찰이 길을 더럽히고 교통에 방해를 준다고 해 시장 형성을 반대했다. 이와 비슷한 시장이 이마미야(今宮), 모리정(森町) 등지에 있었다.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먹던 익숙한 음식이 있고, 어려서 입던 옷이 있었다. 이러한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조선시장 말고는 많지 않았다. 실제 공설시장은 1926년 개설됐다. 이후 1927년경부터 장사를 하던 조선사람이 모였고 많을 때는 2만 명이 넘는 숫자가 왕래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큰 길가의 상점가 뒷골목에 있는 ‘조선시장’이 번성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돌입하자 식재료 등 물자가 부족했다. 경제는 통제되기 시작했고 장사 또한 힘들어졌다. 1941년 물자통제령으로 경찰들에 의해 철거되면서 상점들은 거의 사라졌다. 또 공습이 심해지면서 가게문을 닫고 대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일본인 상점들이 있었으나 절반 정도가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 미군에 의한 공습이 빈번해지자 전술했듯이 공습을 피해 소개(疏開)하는 일본인 상점이 늘어났다. 일본인이 빠져나간 빈 공간은 공습에도 불구하고 큰 길가 상점가에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어 하는 조선인에 의해 메워졌다. 이런 식으로 뒷골목의 조선인 가게가 점차로 큰 길가로 옮겨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공설시장에 일본인과 조선인 상점이 혼재하게 됐다.
여기에서 조선사람은 독자적인 생활문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당시 이곳에서는 조선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동의 경우 대부분은 일본말을 하면서 놀았고, 이들은 2년이 되지 않아서 거의 조선말을 잊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시에 아동이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는 것은 우수한 학교 성적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일본어가 되지 않으면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생활 속에 미신이 뿌리 깊어서 점쟁이와 무당이 성업을 이루었고, 무면허 치과의사가 순회하면서 진료를 했다. 1939년이 되면 이곳은 200여 개의 생활필수품 가게가 생겨났고, 명태, 고춧가루를 비롯해 혼례품 등까지 판매했다.
조지현-이카이노- 일본속 작은 제주
1930년대 초반부터 이카이노를 비롯한 이쿠노 지역에는 영세한 고무공장 등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고무공업의 메카가 됐다. 자립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 조선사람은 자영업에 진출했고,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연 혈연에 의해 유입된 조선인들로 채워졌다.
1925년 이카이노에서 육지 출신으로 구성된 아리랑단과 제주도 출신 청년들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싸움에서 제주 출신들이 이긴 후 다른 곳에서 차별받던 제주 출신들이 이카이노에 모였고, 이곳은 일본 속의 제주가 되었다. 당시 재일코리안 사회 안에는 지방차별의 관념이 존재했고, 특히 제주도민과 육지 출신의 대립이 뚜렷했다. 이 현상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활동가 내부에 존재한 한계 때문에 생겨났다.
일본의 패전이 임박해지면서 조선시장의 모습도 변해 갔다. 태평양전쟁 말 1945년 6월에는 이곳도 공습을 받게 되자, 물품 부족으로 인해 상점가 사람들은 지방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원래 이곳의 주민이었던 일본인들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빈집으로 남겨진 상점을 빌리는 사람은 조선인밖에 없었다. 전술했듯이 1945년 이전에 뒷골목에서 조선의 식재료를 취급하던 가게가 한 채, 두 채씩 큰길 상점가로 옮겨오게 됐다. 장사를 하지 않는 집의 처마 아래에서 판자를 놓고 장사를 시작하는 가게도 있었다. 상점가에 조선인이 나타나게 된 것은 1948년 이후다.
1951년 조선인의 진출을 거북하게 생각한 일본인 상점주를 중심으로 이곳을 일본인을 위한 상점가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출자금 각출 등의 문제에 부딪혀 이러한 시도는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상가 재구성을 시도하던 회장이 사임을 했다. 이후 상가는 동, 서, 중앙으로 나뉘었다.
1950년대 이곳의 조선사람은 상점가의 뒷골목에서 조선시장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계속 성장해 지역을 발판으로 발전하여 정식 회사를 갖게 되면서 기업가로 자리잡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는 관혼상제나 명절 때 조선사람이 필요로 하는 치마저고리나 제사음식 재료와 같은 한국 상품은 이곳에 오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따라서 명절 무렵이 되면 일본 전국에서 모여드는 구매 고객들로 상가는 붐볐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조선사람의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식문화나 전통문화에 대한 의식도 조금씩 바뀌었다.
오사카 이쿠노는 조선사람의 마음의 고향이다. 이곳의 중심이 이카이노였다.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카이노에 대한 기억은 조선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 카. 이. 노.
조지현-이카이노- 일본속 작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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