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을 연구하려니
민족운동사로 박사학위를 했으니 이제는 지배의 측면에서 연구해 보고 싶어 선택한 주제가 ‘군’이었다. 하지만 무모한 선택이었다.
일본어 책이 가장 많이 있다는 국회도서관에도 일본군에 관한 기초적인 사전조차 없었다. 암담했다. 결국 자료가 있는 방위성 사료열람실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선배님께 이를 말하니 첫 반응이 ‘일본사 하러 가는 거네’였다. 그래도 IMF 기간에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 14개월 연구할 수 있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한 6개월 동안 매일 사료열람실에 가서 이것저것 귀찮게 하니 직원이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 같은 한국인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메이지대학 대학원에서 야마다 아키라(山田朗) 선생의 군사사 수업도 1년간 청강했다.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일본에 갈 때마다 틈틈이 자료를 수집했고,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 교수와 여러 군사마니아에게서도 쏠쏠한 도움을 받았다.
처음 축성(築城)한다는 생각으로
2001년 처음으로 일본군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2021년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 운영』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일본군 역사를 편제와 주요 군사행동을 중심으로 개관하는 데 두었다. 1차 사료를 가지고 처음 쓰는 책이니 여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의 일본 육군은 일본공사관수비대→한국주차대→한국주차군→조선주차군→조선군→제17방면군과 조선군관구, 관동군에 소속돼 있었다. 일본은 1918년 조선군사령부를 세우고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주차’ 부대에서 상설하는 ‘주둔’ 부대로 운영방식을 바꾸었다. 이들 부대는 러시아(구소련)를 상대했고, 때때로 베이징 이북지역에서 만주지역까지 투입된 침략부대였다. 1945년 들어 ‘본토결전’이 결정되자 17방면군의 임무는 대미(對美)작전이었고, 대신에 대소(對蘇)작전은 관동군이 담당했다.
한반도의 일본 육군은 침략과 지배의 선봉이자 버팀목이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과 의병을 탄압하며 침략의 문을 열었고, 헌병경찰을 앞세워 부족한 행정력을 메웠다. 3·1운동이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이 최후의 보루임을 증명했고, 이후 군축(軍縮) 속에서도 ‘고(高)정원’을 유지하며 본국의 중국 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그들은 우금치와 석대들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일부터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때까지 제노사이드를 멈추지 않았다. 일본군이 침략한 곳에는 언제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일본군은 만주침략,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15년 전쟁 동안 조선의 총동원체제에 직접 관여하며 다시 통치의 전면에 나섰다. 이때는 몸집을 키우기보다 조선군사령부라는 머리가 커지는 흐름이었지만, ‘본토결전’이 시작되자 제17방면군은 어지러울 정도로 키웠다. 6개월 동안 육군만 약 3만 명에서 최소 29만여 명으로 늘었을 정도다. 그 속에는 조선인 병사도 있었다. 조선인은 전투병보다 대부분 긴급 시설을 짓거나 대규모 수송을 담당할 노동력으로 징병됐다. 그래서 이 시기 병사노무동원을 강제동원사의 새로운 단계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조선군사령부 제1, 2청사. 우측의 일부는 지금도 한미연합사에서 쓰고 있다. (1948년 미군이 촬영한 모습)
아쉽고 또 아쉽고
얼마 전 서고를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책을 내면서도 약간의 찜찜함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틈틈이 모아 놓은 자료가 구석진 곳 박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에 보완할 기회가 있다면…….
특히, 일본의 지배정책과 제국 운영 전략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한반도의 일본군을 보면서 중국에서의 팽창까지 고려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역규정을 고려하면서도 제국 질서 전반까지 확장해 보고 싶다.
경신년 대학살 때 일본군에 살해당한 독립군(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열람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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