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지구적 연결과 네트워크가 두텁다. 2022년 8월 2일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대만을 전격 방문하자,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포위’해 군사훈련을 단행한다. 미국은 필리핀해에 항모전단을 배치한다. 이튿날 한국의 제과·수산업종이 증권시장에서 급등한다. 미·중 수퍼파워는 세계와 한반도의 지정학을 동요시킨다.
13~14세기는 아프로-유라시아에 지구적 대전환의 시대였다. 800여 년 전 수퍼파워는 ‘중국’이 아닌, 전사와 말의 제국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국이었다. 몽골인은 한반도를 새시대로 추동했다. 그 첫 진원지는 텐트 궁전(ordu)과 수도 카라코룸(현 몽골 하르호린)이었다.
카라코룸성(1235) 유지(遺趾)와 에르데니 주(1585) 사원 원경(2022.7.7. 설배환 촬영)
1232년 고려, 동아시아의 몽골 변혁을 마주하다
몽골제국 초대 군주 칭기스칸(재위 1206-1227)이 1211년에 대오르두(몽골 델게르하앙 솜 Avargyn Balgas)를 떠나 남쪽의 여진을 공략했다. 때마침 금의 수도로 가던 고려 사절 겸 장수 김양기가 통주(通州: 현 베이징 내)에서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것이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이다. 칭기스칸은 1219년에 동아시아의 고려와 금, 중앙아시아의 호레즘, 그들 너머의 동·서 지역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며 “세계 정복자”의 길을 열었다. 이는 ‘우연하게도’ 세계사 전환의 시작이었다. 형제맹약은 이후 몽골에 대한 고려의 방어벽으로 충분치 못했다.
대칸을 대면한 최초의 고려인은 상장군 조숙창(趙叔昌)과 시어사 설신(薛愼)이었다. 그들은 1231년 음력 12월 말에 개경을 떠나 이듬해 여름 4월 12일에 “몽골”(蒙古)에 도착했다. 그들은 우구데이 카안(재위 1229-1241)에게 칭신의 표문을 올리고 1225년에 고려 변경에서 피살된 저고여 사건을 해명했다. 그들은 나(羅)·견(絹)·능(綾)·주(紬) 각 10필, 금·은 술그릇, 그림이 들어간 말다래와 부채 등을 카안에게 헌상했다. 당시 카안은 금의 수도 중도(中都: 현 베이징)와 거용관을 거쳐 관산(官山: 현 베이징 서북부 옌칭延慶 두샨獨山)에서 피서했다. 이때는 톨루이의 몽골군이 삼봉산(三峰山: 현 허난성 위현禹縣 소재)에서 자다(jada: 강풍과 폭우, 폭설을 부리는 요술)로 여진 정예병을 대파한 직후였다. 이 전투는 몽골·여진의 패권을 뒤바꿨다.
알려진 바와 달리, 조숙창 등이 대칸을 만난 곳은 카라코룸이 아니라 관산, 곧 “키타이(북중국)의 알탄 헤에르”(Altan Ke’ere: 황금초원)였다. 놀랍게도 바로 두 달 후인 6월에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다루가치 72인을 살해하고 강화도로 천도했다. 이는 음력 8월에 사르탁(撒禮塔)이 고려를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9월에 동생 톨루이가 사망한 후 비로소 대칸은 몽골리아의 대오르두로 귀환했다. 전언에 따르면, 당시 카안은 위독했다. 무당들이 주술을 왼, 나무잔의 물로 그의 병을 씻었다. 카안의 강력한 경쟁자 톨루이가 그것을 마시고 며칠 뒤 사망했다.
사르탁이 8월에 처인성을 공격하다 김윤후에게 피살되었다. 고려는 최초로 몽골행 사절을 구성했다.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낭중 조서장(趙瑞璋)이 10월에 “몽골”로 떠나 12월에 대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곳은 칭기스칸의 오르두―강화~대오르두까지 약 2540㎞―였다. 요컨대 1232년에 고려는 강화~개경~중도~대오르두를 잇는 동북아시아 체스판 위에서 말을 신중하고 대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칭기스칸 대오르두 터(몽골 헨티 아이막 델게르하앙 솜 아바르가 유적, 2012.11.11. 설배환 촬영)
대오르두의 “중앙토대”(2001.08.)(白石典之, 『チンギス·カンの墓はどこだ』, 東京 くもん出版, 2010, p.128)
카라코룸은 고려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1235년에 카라코룸성이 건립된 후 최초로 몽골에 간 고려인은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宋彦琦)였다. 그들은 1238년 12월에 “몽골”에 갔다. 1219년과 1231년의 양국의 강화를 거론하며 군사적 위협을 중단할 것을 대칸에게 요청했다. 계절과 숙영지를 고려하면, 그 도착지는 옹긴강 동쪽의 대칸 동영지였을 것이다. 이후 네 차례 고려 사절이 카라코룸을 방문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영녕공(永寧公) 왕준(王: 1223-1283)이 인질로 1241년 4월 고려를 떠나 대칸의 사망 직전 가을에 몽골―강화~카라코룸의 거리 약 2800㎞―에 도착했다. 그는 체류 중 카라코룸성을 밟았을 것이다.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 ?-1261)은 1239년과 1245년 두 차례 몽골에 갔다. 후자의 사행은 1249년까지였다. 구육(재위 1246-1248)이 1246년 7월에 옹긴숨(현 바얀골 솜 샤잔호트 Shaazan-Khot)에서 제3대 카안으로 등극했다. 교황의 사절 카르피니(Plano Carpini)가 이 즉위식에 참석해 “솔랑기(고려)의 수령”, 아마 왕준 혹은 왕전을 목격했을 것이다.
기록상 카라코룸에 간 유일한 고려인 김수강(金守剛)이다. 그는 1255년 6월에 뭉케 카안(재위 1251-1259)을 따라 카라코룸성으로 들어가 방물을 바치고 몽골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건립 후 20년 만에 성의 명칭이 고려 문헌에 실린 것이다.
카라코룸과 그 인근 계절 숙영지에 방문한 고려인은 한국사에 중요한 공헌자다. 그들은 13세기 세계 지리에 고려를 자리매김했다. 『몽골비사』의 “솔랑가스”(Solangγas), 페르시아어 자료의 “솔랑카(Solangqa)~솔랑기(Solangi)”와 “카울리”(Kawll), 유럽 여행기의 “솔랑기”(Solangi), “솔랑가”(Solanga), “카울레”(Caule), “카울리”(Cauli)가 그 증거다. 이들 어휘가 오늘날 “한국”을 가리키는 몽골어 “솔롱고스”(Solongγos), 페르시아어·유럽어 “코리아”의 기원이다.
카라코룸성 조감도와 에르데니 조 사원(중앙 하단)
카라코룸성 모형(좌측 중앙 흥원각)(2022.7.7. 설배환 촬영)
성소(聖所), 카라코룸 수도권, 그리고 제국의 중심
오르콘(Orkhon) 계곡은 몽골리아에서 신성한 땅이자 전략적·경제적 요충이었다. 이 계곡에 두 곳의 고대 유적이 있는 까닭이다: 돌궐·위구르 제국의 수도 오르두 발릭,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카라코룸은 몽골초원을 중국과 서아시아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항가이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중앙 몽골의 초원으로 이어진다.
이 지정학적 배경 아래 칭기스칸이 1220년에 카라코룸―몽골어 “검은 자갈밭”의 뜻―을 도읍으로 정했다. 우구데이 카안이 1229년 즉위 후에 오르두[行宮幄殿]를 개조했다. 1235년에 초원에서 금장(金帳)이 목격되었다. 그것은 나무를 격자로 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금실로 짠 직물로 덮고 다시 그 위에 하얀 펠트로 덮은 군주용 황금 텐트였다. 이는 하영지의 시라 오르두였다.
1235년에 대칸은 키타이의 장인을 동원해 카라코룸 성과 만안궁을 건축했다. 기술 책임자는 유민(劉敏)이었다. 궁성이 완공되자, 카안은 연회와 은사를 베풀었다. 대칸이 성에 머무는 때는 봄 2~3월에 1개월 남짓이었다. 그것은 진흙 성벽이었고 사방에 하나씩 4개의 문이 있었다. 성 동문에서 곡물, 서문에서 양과 염소, 남문에서 소와 수레, 북문에서 말이 팔렸다. 뭉케 카안 시대에 1.6㎢의 성(남북 1450m×동서 1138m)에는 1만~1.5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 그들은 몽골인, 고려인, 거란·여진 등 한인(漢人), 티베트, 위구르, 페르시아인, 인도인, 프랑스·헝가리·러시아 등지의 유럽인을 포함했다. 종교 시설로 불교·도교 사원 열두 곳, 이슬람 사원 두 곳,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한 곳이 있었다. 성의 서북쪽에는 유목민 게르가 군집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컨대 카라코룸은 다종족·다종교·다문화의 경제 도시였다. 카라코룸은 1235년에서 1260년까지 몽골제국의 수도였다. 이후 그곳은 제국의 “만리 북변”이었지만, 군사·경제(교역·농경·목축·사냥) 면에서 몽골인에게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카라코룸은 14~15세기에 대원(이른바 “북원”)의 수도로 존속했다.
장인의 기술 경쟁, 아시아의 최고를 품다
에르데니 주 사원은 몽골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티베트 불교 사원(1548)이다. 그 서북쪽 바깥에 길이 2.65m의 화강암으로 만든 귀부(龜趺)가 놓여 있다. 바로 옆에 대형 건축물 터가 있다. 그것은 흥원각(興元閣) 유지(遺趾)다.
1254년에 루브룩은 프랑스 생드니(St. Denis)의 수도원이 카안의 궁전보다 열 배는 낫다고 평가했다. 그가 떠난 2년 후에 뭉케 카안은 만안궁 터에 대불탑과 전각을 완성했다. 이 전각은 5층 건물에 높이가 300척(약 90m)―황룡사 목탑은 약 80m―에 달했다. 이 사원은 대합사(大閤寺)라고 불리다 1346년에 “흥원각”으로 개축되었다. 허유임(許有壬 1287-1364)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 흥원각과 견줄 만한 사원 누각은 없었다.
‘중국풍’ 건축과 거리 풍경이 카라코룸에 펼쳐졌다. 우구데이 카안에게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바그다드와 경쟁한 것이었다. 무슬림 장인은 그것을 비웃었다. 대칸의 명령으로 그들은 카라코룸 북쪽 40km 거리에 “빛나는 하얀 궁전” 게겐 차간(Kehen Chaan)을 1237년에 완성했다. 이 궁전이 춘영지 이궁(離宮: 현 Doityn Balgas)이었다.
초기 카라코룸의 외관은 일부 이방인에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 내부는 달랐다. 우구데이 카안은 금 세공인에게 명령해 주옥(酒屋)에 코끼리·사자·말 등 동물 형상의 각종 금·은 술통을 만들었다. 그 앞에 은제 술그릇을 하나씩 놓고 동물 입에서 포도주와 쿠미스를 흘려보냈다. 프랑스 금세공인 기욤 부시에(Guillaume Buchier)는 은제나무 모양의 주기(酒器)를 뭉케 카안의 궁전 입구에 설치했다. 그것은 네 마리 은 사자와 금도금 뱀의 형상을 했으며 그것을 통해 포도주·말젖·흑마유·꿀술·쌀술을 흘려보냈다. 곡주와 포도주 운반용으로 각기 소 8마리가 끄는 거대한 수레가 준비됐다. 카안의 재고는 식량과 음료와 보화로 가득 차 있었다.
흥원각비 귀부와 흥원각 기단부(상단 흰색 부분)
흥원각 기단부(2022.7.7. 설배환 촬영)
모든 길은 카라코룸으로 통하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 중심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이른바 “잠치”(ami)다. 이 역전제는 약 40km마다 말과 식량을 갖춘 역을 설치했다. 이로써 대칸은 사절과 상인의 안전, 정보 전달, 물자 운송의 편리를 확보했다. 역참은 군사 활동과 통신, 경제 발달에 공헌했다. 식량과 음료가 매일 수레 500대에 실려 카라코룸으로 들어왔다. 1316년 관중에서 변란이 발생했을 때,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그 소식이 카라코룸에 당도했다.
모든 역로는 카라코룸으로 통했다. 이로써 카라코룸과 그 주변 숙영지는 “카라코룸 수도권”이라 일컬을 만한 제국의 중추가 되었다. 13~14세기 몽골인과 카라코룸의 빠른 성공의 요인은 그 유연성과 집중성, 개방성에 있었다.
우구데이 카안 춘영지 이궁(離宮) 게겐 차간(2012.8.18. 설배환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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