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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
  • 박정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배봉기할머니

 

끌려온 땅, 오키나와에 남기 위해 위안부였음을 밝히다

 

197510. 일본 오키나와.

배봉기가 추방당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오키나와에 도착한 것이 194411월이었으니 이곳에서 살아간 지 만 31년이 지난 때였다. 배봉기는 19149월에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태어난 뒤 얼추 조선에서 30, 오키나와에서 30년을 살았다. 아니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폭력 속에서 살아남았다.

일본군이 패전한 뒤 미군의 통치 상태에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에 다시 일본 정부에 반환되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 살고 있는 조선인 중 1945815일 이전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에 대해서만 특별영주를 허가하겠다고 발표했다. 3년 이내에 신고해야 했다.

배봉기는 원해서 온 땅은 아니었으나 오키나와에서 쫓겨나면 어딜 가서 살아야할지 막막했다. 지인이 있거나, 집이 있거나,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죽음이 지배했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뒤 배봉기가 몸으로 일해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곳이었다. 배봉기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니었지만 오키나와 주민의 일부로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고 마감 기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지만, 한글이든 일본어든 글을 배운 적이 없는 배봉기는 어떻게 서류를 내야할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식당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식당 주인은 배봉기가 일본에 오게 된 사연을 적어 오키나와 현 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배봉기가 과거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끌려온 사실이 드러났다

배봉기는 공론장에서 처음으로 자기피해를 증언한 생존자였지만스스로 선택한 결과는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의 일상이 강제로 노출되었고, 그녀를 취재하거나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많은 이들이 배봉기의 인간 기피에 부딪혀 돌아갔지만, 그 옆에서 이야기를 담은 이들도 있었다. 야마타니 테쓰오(山谷哲夫) 감독은 자신이 방문했을 때의 배봉기 모습을 담아 1979년에 기록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のハルモニ)를 개봉했다. 또한 배봉기와 나눈 대화를 녹취하여 같은 해 12월 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책의 부제는 대일본매춘사(大日本賣春史)’이다. 이 작품 안에서 배봉기의 삶은 감독의 시각과 의도에 따라 분절되고 배치된다.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10년 가까이 배봉기의 이야기를 듣고 1987빨간 기와집: 조선에서 온 종군위안부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2014년 한글로 번역되어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빨간 기와집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머리말에서 가와다 후미코는 책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봉기 씨가 걸어온 인생이 너무나 처절해서 젊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지배와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망 안에서 스스로 원하는 일상을 만들어갈 권리를 박탈당해온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작성된 문서자료가 드물고, 이들의 삶을 표현할 언어는 빈약하며,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을 기억함으로써 여전히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관계에 갇혀 있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해방시키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전쟁 중 오키나와에 연행된 한국여성, 30년 만에 ’자유‘를 손에. 불행한 과거를 고려, 

법무성 특별재류를 허가’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고치신문(高知新聞), 1975.10.22.]

 

그곳은 천국이라고 했다


신례원에서 살 무렵 배봉기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두 살 위 언니도 여덟 살 때 남의집살이를 갔고, 세 살 아래 남동생과 둘이 살았던 배봉기도 일곱 살부터 남의집살이를 가야했다. 열일곱이 되던 해에 서른이 넘은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돈 벌러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열아홉에 다시 결혼한 남편은 아버지처럼 머슴살이를 했다. 생활력이 너무 없었고 결국 다시 헤어졌다그 후 배봉기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았다. 1943년 늦가을, 함경남도 흥남 어느 농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소개꾼인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가 서른살의 배봉기에게 파인애플과 바나나가 지천인 따뜻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고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나나가 저절로 떨어진다고 했다흥남역을 출발하여 서울에서 한 달 가량 머무는 동안 여자들이 늘어났다. 가네코라는 이름의 조선인 남자를 따라 부산에서 한 달 남짓 머물 때 여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1944년 음력 3월이 되어 배봉기와 여자들은 곤도라는 일본인 남자와 가네코에 끌려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 모지(門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요시무라와 스즈키가 가세했다. 곤도의 부하인 남자 세 명은 여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나중에 이들은 오키나와 각지에 개설된 위안소의 관리인이 되기도 했다. 모지에서 시간을 보낸 지 6개월 만에 배봉기 등은 가고시마(鹿島)로 보내졌다. 여자는 모두 51명이었다.

배봉기 등이 징용수송선 마라이호를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한 것은 미군의 공습(10·10 공습)이 끝난 뒤인 1944117일의 일이었다. 오키나와의 거리는 재와 쓰레기 더미로 뒤덮여 있었다. 타다 남은 병원에 끌려온 여자들이 수용되었고 곧 갈 곳이 정해졌다. 게라마(慶良間) 제도라고 불린 도카시키(渡嘉敷), 자마미(座間見), 아카(阿嘉)섬 세 곳에 각각 7명이, 나하(那覇)20명이, 다이토(大東) 제도에 나머지 10명이 보내졌다. 배봉기는 인솔자인 가네코를 따라 도카시키섬으로 갔다.

 


도카시키섬 빨간 기와집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2018.9. 김재영 촬영)

 

지옥에서 살아남다


도카시키섬에서 여자들이 작은 초가집에 며칠 머무는 동안, 일본군은 자신들이 접수한 민가를 가네코에게 위안소로 고치라고 하였다

마을 외진 곳에 있는 빨간 기와집이었다. 가네코는 방 네 개를 베니어판으로 막아 여섯 개로 만들고 축사 겸 창고도 방으로 만들어 여자 일곱 명에게 하나씩 주었다이곳에서 배봉기의 이름은 아키코로 바뀌었다. 다른 여자들의 이름은 기쿠마루, 하루코, 스즈란, 밋짱, 아이코였다빨간 기와집 입구에는 군인들이 잔뜩 줄을 섰다. 군인은 먼저 정산소에서 표를 산 후 자기 차례가 오면 방으로 들어와 위안부에게 표를 건넸다. 하루가 끝나면 위안부들이 가지고 있던 표의 수를 세어 수입을 계산했는데, 손에 들어오는 현금은 없었다. 도카시키섬까지 오는 데 사용된 모든 경비가 그대로 빚이 되었다고 했다. 부대가 이동하면서 그곳에 임시 위안소가 개설되었고 위안부들도 다시 배치되었다1945321일부터 미군 비행기 B-29가 오키나와로 날아왔다. 323일 아침 배봉기가 일어났을 때 마을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오전 10시쯤 공습경보가 울렸다. ‘위안부들은 방공호로 피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일어나 강가 사이로 들어갔다. “언니, 우리도 같이 가!”라고 울부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배봉기는 위안소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허벅지를 질질 끌며 기어 나오는 밋짱과 아이코를 봤다. 그러나 그대로 방공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공습은 연일 이어졌다. 하루코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빨간 기와집이 거의 다 타버린 뒤 위안부들은 산으로 피하라는 일본군의 지시를 들었다. 살아남은 위안부네 명은 관리인 가네코를 따라 234고지의 제3부대 진지로 갔다. 몇 달씩 산에 있으면서 군복을 빨고 군인 심부름을 했다. 어느 날 기쿠마루와 스즈란이 징용병들과 함께 진지를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남은 위안부는 배봉기와 가즈코였다. 산에서 지내면서 배봉기는 굶주림과 두려움을 버티며 살아남았다.

1945818일 제3부대가 항복했다. 배봉기 일행은 826일 계곡에서 내려와 무장해제식에 참석했다. 그 뒤에 소지품 검사를 받고 민간인들과 함께 자마미섬의 수용소로, 다시 오키나와 본섬의 야카 수용소로, 다시 이시카와 수용소로 보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때에 배봉기는 이시카와 수용소를 나와 버렸다그 뒤 배봉기는 오로지 걷고 또 걸었다. ‘속아서 일본군에 끌려와 낯선 땅에 버려졌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쳐진 것은 비로소 혼자 오키나와 길을 걷던 순간이라고 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했고,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다.

 


1945.4.1. 연합군 공습으로 폐허가 된 오키나와 나하(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1945.8. 이시카와 수용소(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뿌리는 없으나 가지는 있다


일본군이 전쟁이 진 뒤 미군이 통치하는 땅에서 배봉기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았다. 197510월에 배봉기는 오키나와 본섬의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 있는 헛간에서 살고 있었다. 이때 찾은 방문객들이 그녀에게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배봉기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889월에 배봉기를 찾은 일본 기자가 함께 고향에 가자고 말했을 때 그녀는 글쎄, 가고 싶지, 한번 가야지하고 말하다가 한참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김현옥·김수섭 부부는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1975년부터 꾸준히 배봉기를 찾아갔다. 함께 온천도 가고 고기도 구워먹는 일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배봉기가 역시 조선 사람은 조선 것을 먹어야지라고 말하는 날도 있었다. 일상의 관계 속에서 배봉기는 아지매가 그렇게 된 것이 팔자 탓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탓이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탓이라는 말도 들었다. 19891월 히로히토 일왕이 숨졌다는 뉴스를 보고 배봉기는 왜 사죄도 안하고 죽었냐는 말을 했다.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도 했다. 더 이상 괴롭게 고국을 떠올리지도 않고 폭력의 시대를 만든 이들에게 분노했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김학순이 공개증언을 하고 일본군위안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인 19911018, 배봉기는 오키나와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는 배봉기를 기억하는 많은 재일코리아인, 오키나와인들이 참석했다. 배봉기는 뿌리없이 살았으나 많은 이들이 곁에서 가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가지는 언젠가 뿌리가 될 것이다.

 


배봉기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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