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4
조선의용대(군)와 한중 항일연대
  • 김정현 재단 명예연구위원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다


193777일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710일 중국 내 한인 혁명단체의 지도자들은 장제스(蔣介石)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한중이 연합하여 항일할 것을 합의하였다. 중국 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인 무장단체는 조선의용대다.

19381010일 후베이성 우한(武漢)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으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한중 양측 인사가 공동 지도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평등합작한 군사기구다. 중국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조선의용대 성립대회 연설에서 국제연합과 통일전선이 동방 피압박 민족의 기본 전략이며, 독립과 해방을 위한 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그 의의를 강조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군에 대한 반전 선전,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항전 선전 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대는 대만의용대와 중국 내 일본인민 반전동맹을 이끄는 국제부대의 역할도 하면서 한국, 대만, 일본 세 민족이 연대한 국제조직으로 발전하였다.

193810월 말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옮겼다가, 19403월 국민정부의 전시 수도인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 일부 의용대원은 우한에서 무장선전대 활동을 하다가 국민당군과 함께 후베이, 후난, 광시의 각 전장으로 흩어졌다.


타이항산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건립하다

  

충칭의 조선의용대 본부의 일부 대원은 중국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전 태도가 조국의 항일 독립운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항일투쟁의 근거지를 한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화북지역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다. 1940114일 조선의용대 간부회의에서 김원봉과 본부는 충칭에 남고, 일부 대원은 화북의 대일 최전선에서 항전하는 팔로군(八路軍) 구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제3지대 지대장 박효삼과 정치지도원 윤세주는 19411월 대원들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최전선인 타이항산 항일근거지로 이동하였다. 팔로군의 전방 총사령부가 주둔한 타이항산(太行山) 근거지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산둥, 허난(河南) 4개 성의 경계에 걸친 산악지대로, 팔로군은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일본 침략군을 공략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1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건립하고,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다. 이들은 산시성 줘췐현(左權縣) 샹우촌(上武村)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무장선전을 하면서 일본군 포로의 심문과 반전 활동, 대중 문화선전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호평을 받았다.

일본군은 조선의용대 활동을 주시하였고, 194112월 허베이성 후자장(胡家庄)에서 주민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이던 조선의용대 제2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전투 중 여러 대원이 전사하였고, 최후의 분대장의 저자인 김학철은 중상을 입었다. 조선의용대와 중국 측 인사들이 전투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의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조선의용대는 타이항산 윈터우디촌(雲頭底村)으로 옮겨 주둔하며 항일 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은 19422월의 대대적인 공세에 이어 5월에 40만 병력과 전차, 전투기를 동원하여 타이항산 팔로군 본부에 대한 소탕전을 벌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팔로군과 함께 반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포위되어 격전 끝에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다. 조선의용대 주축인 윤세주와 진광화는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팔로군 지도부의 안전한 퇴각을 성공적으로 도왔다. 마지막으로 퇴각하던 그들은 결국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조선의용대의 애국적 기개와 국제주의 연대, 독립투쟁을 높이 평가하였고, 19429월 조선의용대 열사들에 대한 추도대회를 열었다.



원터우디촌 마을 입구 문루에 한글로 쓴 항일표어

"왜놈 상관 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롭게 쓰도록 요구하자"고 한글로 쓴 표어가 남아 있고, '조선의용군 옛터'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다

 

지도자들이 희생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5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되었고, 중국국민당 소속에서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정규 편제로 들어가면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충칭의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19425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켰고,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은 줄곧 ‘KT’로 약칭되는 ‘KOREAN VOLUNTEERS’를 영문명으로 사용하였고, 이는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역사적 계승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중국 동북과 조선에서 많은 한인을 화북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톈진(天津) 등에 조선징병특별훈련반을 만들었다. 타이항산의 조선독립동맹은 일본군 점령구에서 탈출해 오는 한인들을 조선의용군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194210월 서현(涉縣) 중위안촌(中原村)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웠다.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기 위한 전술을 적극 구사하였고, 조선의용군의 선전과 심리전에 영향을 받은 일본군 내 한인과 일본인 사병들이 투항하였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타이항산 외에도 산둥이나 산시성(陝西省)의 중국공산당 항일유격구로 흩어져 정보수집 활동을 하였고, 산둥과 장쑤성(江蘇省) 항일근거지에도 한인 군정학교와 특별훈련반을 만들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31, 항일전쟁 시기 중국공산당 중앙 소재지인 산시성 북부 옌안(延安)에 분맹을 창립하였다. 타이항산 조선의용군의 주력부대와 학생대원들은 1943년 말부터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고 의용군을 훈련시키기에 안전한 옌안으로 이동하였다. 1944년 초 타이항산을 떠난 조선의용군 주력 약 200명은 옌안의 뤄자핑촌(羅家平村)으로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옮겼다. 간부 양성과 조선 독립을 위해 설립된 조선항일군정학교는 조선의용군의 사령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계속 일본군 지역에서 탈출하여 타이항산으로 모여드는 한인 청년들을 위해 19449월 난좡촌(南莊村)에도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고 정율성(1918~1976)이 교무주임을 맡았다.

이처럼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무장 대오를 갖추고 대륙을 누비며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함께 대일 항전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반전, 평화 연대 활동을 펼친 조선의용대()의 항전 활동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OPEN 공공누리 -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출처표시 - 상업적이용금지 - 변경금지)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작한 '조선의용대(군)와 한중 항일연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