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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러시아 한국학의 선구자, 뒤바보 계봉우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계봉우(1916년 11월 28일, 용정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 압송 시)


한미한 집안 출신에서 한말 계몽운동가로

 

계봉우는 188081(음력) 함경남도 영흥의 관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가계나 부친의 이름도 알 수 없고 모친이 장 씨라는 것 외에 알려진 바 없다. 유년 시절의 계봉우는 그야말로 독학을 통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 7살부터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서삼경과 사기를 읽었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구학을 공부한 것인데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공부를 중단했다. 이후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15세부터 24세까지 동학에 입교하기도 하고, 정감록, 점술, 사주, 관상법 등을 공부하고 병서도 섭렵하였다. 도인이라 알려진 최통 선생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정감록의 정도령을 찾아 백두산 일대를 뒤지는 등 방황의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마음을 바로 잡았다. 190610월 김정규, 권영호 등과 함께 영흥에 홍명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 역사, 지리와 한문을 가르쳤다. 1907년 이후 이동휘의 권유로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의 영흥지회에 가입하였고, 민족적 비밀단체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1908년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1910년에는 함흥의 기독교계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차 망명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경술국치 이후 191012월 계봉우는 이동휘 등 30여 명과 함께 기독교 포교라는 명목으로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북간도 소영자에 위치한 길동기독학당에서 조선역사와 조선지지를 가르쳤다. 아울러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에도 가입하고 월간잡지 대진의 책임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역사, 오수불망, 신한독립사등 역사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계봉우는 1911년경에 북간도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2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 이후에는 한인 자치기관 권업회에 참여하여 권업신문기자로 활약하였다.

191310월말 이동휘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광복군 정부의 책임비서로 활약했다.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 발발 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할 이 군정부의 최고 책임자의 직함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던 정감록에서 따온 정도령인데, 1대는 이상설, 2대는 이동휘였다. 계봉우는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가져다준 자료들을 바탕으로 19146월부터 8월까지 권업신문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였다.

1914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 정부는 36명의 한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추방명령을 내렸다. 이동휘와 계봉우는 북간도 왕청현 하마탕(蛤蟆塘)으로 도피하였다. 191611월 당시 이동휘가 부인 강정혜의 생일을 맞아 가족 및 동지들과 해후하기 위하여 하마탕에 머물고 있었는데, 북간도 용정의 일본 총영사관이 형사들을 급파하여 이동휘 본가를 덮쳤다. 이동휘는 동네 청년들의 제보로 미리 탈출하였지만, 계봉우는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계봉우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영종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이후 3년간 고향 영흥에 유리안치되었다.



상하이 시절의 계봉우와 동지들 (앞줄: 현정건, 이동휘, 박진순, 김립, 뒷줄: 김철수, 계봉우, 이증림)

 

3.1운동과 제2차 망명 이후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혁명운동

 

계봉우는 1918년 말 함남 덕원에서 만난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으로부터 서울에서 대중적인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로 227일 서울로 올라갔다. 3.1운동 당시 제2차 만세시위 운동의 지휘책임자였던 강기덕의 요청으로 세브란스 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여 건네주었다.

계봉우는 3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목격한 후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가 영흥으로 귀환하였다. 원산에서 강우규를 만나 훗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폭탄투척사건의 공모자가 되는 최자남을 소개받고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했다. 19198월의 일이었다.

신한촌에서 철혈광복단에 가입한 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하여 북간도 하마탕을 방문했다. 북간도의 국민회는 계봉우를 유례균과 함께 상해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하였다. 191911월경 북간도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거행된 자신의 철혈광복단 단장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철혈광복단의 일부 단원들이 반대했지만 다수 의견에 따라 중국 상하이 행을 선택하였다.

계봉우는 19191126일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과 독립운동사 재료수집원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독립신문주필 이광수의 청탁에 따라 19201~5월에 걸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를 시작으로, 아령실기, 김알넥산드라소전, 의병전등 북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계봉우는 19204월 김립의 권고로 일본인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사회주의 신수를 읽고 사회주의를 접하고 곧바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고 기관지 자유종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19209월 초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한인사회당을 한인공산당으로 확대·개편하였다. 대회에서 계봉우는 김립, 이한영과 함께 러시아로 파견할 대표로 선정되었다. 계봉우는 923일 상하이를 떠나 중국의 베이징과 장자커우(張家口), 몽골의 울란바토르, 러시아의 베르흐네우진스크를 거쳐 원동공화국의 수도 치타로 들어갔다.

192012월 계봉우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 원동부 산하 한인부의 5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계봉우는 전한공산당 조직의 권한을 자임한 한인부의 선전선동 출판부장의직책을 맡아 19212월 이후 기관지 노동신문을 발간하였다. 이후 계봉우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이를 후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동양비서부장 슈미아츠키(B.Z.Shumiasky)518일 임시고려혁명법원을 조직하고 계봉우 등 한인부 간부들에 대한 재판에 착수했다. 한인부 간부들은 이미 59일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516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상태였다. 재판 결과 박애는 5년 징역, 계봉우와 장도정 그리고 김진은 3년 징역에 처해졌다. 계봉우는 이동휘의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전개한 외교활동 덕분에 석방되어 치타에서 조선인 청년회 잡지 새사람의 주필로 활약했다.

 

    

1936년 1월 28일 작성한 계봉우 자필 이력서

 

시베리아내전 종결 이후

러시아 원동에서의 교육·문화운동

 

시베리아내전이 종결된 1922년 말 이후 계봉우는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여러 기관과 단체의 요청으로 한인 아동들을 위한 조선어 교과서를 집필하는 한편, 소학교 등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또한 계봉우는 한인사회에 남아있던 종교와 전통적인 미신과 관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오성묵과 함께 무신()동맹을 조직하였고, 한글신문 선봉에 반종교, 무신자운동과 관련한 글을 기고하였다. 과학의 원수(1930)나 고려인 무신동맹의 요청으로 집필한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1931)은 그 활동의 성과물이었다. 계봉우는 한인사회의 언어생활과 관련한 두 개의 중요한 논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오창환과 주고받은 고려문전논쟁과 한자폐지론 - 한자제한론 논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러시아 원동의 국제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계봉우는 공개적 활동을 자제함과 동시에 자신의 저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집중하였다. 그 노력의 성과물이 동학당폭동(1932), 조선역사1·2(1936) 등이다. 1937년에는 고려사범대학 교원인 강채정과 공저로 고려어교과서(1937)를 저술하였다.

계봉우는 1936128일 자로 자신의 리력서를 작성하였다. 리력서에는 교육사업이나 저작사업의 경우 1935년까지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민족혁명사업의 경우에는 상하이 한인공산당의 파견으로 베르흐네우진스크(Verkhneudinsk)로 들어간 1920년 말에서 끝나고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리력서를 남긴 1936128일의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511월부터 19363월에 이르는 시기에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이문현, 최태열, 홍파(이민환), 박일리야, 이인섭 등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들이 소련 내무인민위원부에 의해서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계봉우는 스탈린 대탄압의 먹구름이 덮쳐 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계봉우의 4남 계학림은 이 무렵 부친이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그들과 찍은 단체사진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시골교사로 눈에 띄지 않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강제이주 이후 크즐오르다에서의 말년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Kyzylorda)로 강제이주된 이후 선봉이 폐간되고 레닌의 기치라는 새로운 제호의 한글신문이 창간되었다. 새로이 모집된 편집인들은 경험도 적고 상식도 부족한 상태였다. 새로운 편집인들은 계봉우를 초청하여 여러 차례의 단기 강습을 열고 국어 문법을 공부하였다. ·소전쟁 시기인 1941년에 후일 저명한 러시아 한국 학자로 성장하는 박미하일이 찾아왔다. 계봉우는 박미하일의 한문 학습을 도와주었고 동학당 폭동조선역사의 필사본을 보여주었다.

계봉우는 60세가 되는 1940년 이후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우선 자서전 꿈속의 꿈집필에 착수하여 1944년에 완성했다. 아울러 그는 평생의 학술적 성과들을 완성하기 위한 집필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조선말의 되어진 법(1941), 조선문법(1947~1948), 조선문학사(1·2, 1950), 조선역사(1·2·3, 1953), 조선말의 되어진 법(1955)이 그 결실이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을 한국을 방문한 계학림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부친의 저술들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계봉우는 195975일 오전 7시 반에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57일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 생전에 항상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 묻혔다. 20194월 계봉우와 아내 김야간 부부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전용기로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간절히 원했던 고향 영흥으로의 귀환은 아니지만 유해로나마 한반도 남쪽으로 돌아왔다. 고국을 떠난 지 100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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