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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증식계획은 조선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켰는가?
  • 이영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일제의 농업생산정책』 (동북아역사재단, 2022)


동북아역사재단의 일제침탈사 편찬사업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실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종합하여 총서로 발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자료총서, 연구총서, 교양총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경제·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학계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일제침탈사 시리즈에서는 발간된 일제침탈사 총서 가운데 한 권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1906년 6월에 설립된 수원 권업모범장(출처: 수원박물관

    

일본 메이지농법의 조선 적용

1900년 이후 일본인들은 광범위하게 조선의 농업을 조사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농상무성(農商務省)에서 일본 관료와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학과 교수를 파견해 조선 8도의 농업사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해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1906)라는 종합보고서를 발간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은 대한제국 정부가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설립하려고 했던 농사시험장을 저지하고, 일본인 관료와 경비로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립해 대한제국에 이양한 뒤 다시 인계받아 일본의 메이지농법을 실험해 조선에 적용하고자 했다.

    

1906년 6월에 설립된 수원 권업모범장(출처: 수원박물관

1906년 6월에 설립된 수원 권업모범장(출처: 수원박물관)


1910년대 식민지 농업구조로의 재편

1910년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면서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의 공급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예산 중 30 ~40%를 헌병경찰 유지비용에 사용하고, 사회간접자본에 30 ~40%를 지출해 산업진흥에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은 20 ~30%에 불과했다.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내기 위해 농업 부문에서 미작, 면화, 양잠의 종자 개량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논농사에서는 일본 벼 품종의 비율을 확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19122.8%에 불과하던 일본 벼 품종의 비율은 1921년에는 61.8%에 이르렀다. 면화는 육지면으로 대체하고자 했고, 양잠업에서도 일본 뽕나무와 누에 품종으로 개량하면서 일본 자본가를 위한 원료 공급을 시도했다.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군산항에 쌓아 놓은 쌀(1920년대)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군산항에 쌓아 놓은 쌀(1920년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추진과 농민 생활의 곤궁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일본은 만성적 쌀 수입국이었고, 그 와중에 1918년 일본 본국에서 쌀소동이 일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에서 쌀을 증산해 일본으로 이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의 농업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수리시설을 확대하면서 관개면적의 혜택을 받는 농지면적이 크게 늘어났고, 일본의 우량품종 식부(植付) 면적이 크게 증가했다. 시비량이 늘면서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증가했다.

  반면에 미곡을 중시하는 수전농업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조선의 전통농법 혹은 재래품종은 축소되거나 소멸되었다. 증산된 쌀은 대부분 일본에 값싸게 이출되었다.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면서 조선 농민의 노동 강도는 강해졌지만, 수리조합비와 세금 등 공과금의 증가로 인해 지주와 일부 농가를 제외한 대부분 조선 농가의 경영수지는 적자였고, 채무도 누적되어 갔다. 농촌사회는 전반적으로 피폐해졌으며 대부분의 조선 농민은 몰락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농

민층이 전반적으로 몰락하는 가운데 농민들의 의식이 성장하면서 소작쟁의가 폭증했다.

    

산미증식계획의 중지와 전작개량증식계획

  1929년 세계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일본 자본주의도 큰 위기를 맞았다. 일본 농림성과 일본 지주들은 조선과 대만에서의 쌀 이입이 일본 미가를 더욱 떨어뜨리는 이유라고 보았다. 1933년 대풍작으로 일본과 조선의 쌀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조선미가 일본에 들어온다면 일본 미가의 큰 폭락을 가져올 것이란 이유로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자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 대신 피폐해지는 농촌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농업 경영 다각화를 모색하면서 전작개량증식계획을 추진했다.

  아울러 농가 경제 수지는 악화하고 부채는 누적 증가하면서 1920년 후반부터 농민의 소작쟁의는 격렬해졌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농가갱생계획혹은 농촌진흥운동등을 추진하면서 농촌재생운동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40년대 조선증미계획의 실시와 전시체제

  1937년 일제는 중국 본토를 공격해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전쟁 상황으로 돌입했다. 1940년 동남아시아 침략, 1941년 하와이 침공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 된 일제는 전쟁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면서 일본과 조선을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체제로 재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전쟁 수행을 위한 군량미 확보를 위해 1940년에 조선증미계획을 세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식량 증산이 더욱 긴급하게 되자 1942년에는 조선증미갱신계획을 수립해 추진하였다. 하지만 전시체제로 인해 농촌 노동력과 자재, 비료 등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대가뭄까지 겹쳐 쌀 수확량은 평년의 70%에 그치고 말았고, 조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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