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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결혼을 이해하는 방법
  • 위가야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나들이 가는 고구려 부부의 모습(남포시 수산리고분 벽화)

나들이 가는 고구려 부부의 모습(남포시 수산리고분 벽화)



  과거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이전의 모든 시기가 과거이지만,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 시대는 과거가 아닌 현재였다. 하지만 현재든 과거든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는 변치 않는다. 즉 지금도 그때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 다만 달랐던 것이 있었다. 삶을 살아가는 조건이 달랐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살았더라도 그 삶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었다.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부부가 식사를 하는 모습(중국 지안 소재 각저총 묘주부부도) (출처: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현북스, 2022, p.139)

고구려 부부가 식사를 하는 모습(중국 지안 소재 각저총 묘주부부도)

(출처: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현북스, 2022, p.139)



삼국지동이전에 보이는 고구려 신랑들의 장가가기

  삼국지동이전 고구려 관련 기록에 고구려의 남성이 장가가기 위해 들여야 했던 피땀 어린 눈물의 흔적이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양가 사이에 혼인의 약속이 정해지면 여자 집에서 그 집 옆에 작은 집을 하나 지었는데, 그 이름을 서옥(壻屋)이라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위집이다. 집이 지어지면 사위 될 남자가 여자 집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앉아 절을 하며 서옥에 들어가 아내 될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기를 청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드디어 여자의 부모의 허락을 받으면 서옥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이때 서옥 옆에는 돈과 옷감이 쌓여 있었다. 사위는 서옥에서 아내와 함께 살다가 태어난 아들이 다 자라면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고구려의 신랑은 이미 다 약속을 정한 혼인이라도, 신부 집앞에서 몇 번이나 절을 하며 사위로 삼아주기를 간청하고, 또 아들이 다 자라기 전까지는 그 집에서 반쯤은 머슴 생활을 해야 했다. 서옥 옆에 쌓아 둔 돈과 옷감을 어느 집에서 마련했는지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일종의 혼납금(婚納金)으로 보아 신랑이 가져간 것을 서옥 옆에 쌓아두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기록을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혼인할 때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으면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해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근거로 돈과 옷감을 신부집에서 마련해 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돈의 성격은 신랑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신부집에서 지불한 것이 된다.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머무는 관습은 비단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 실린 가실 이야기에는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 신랑을 신부집으로 부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관습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해졌다. 이는 부계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정착되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가 되어야 점차 쇠퇴할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전통이었다. 오늘날에도 부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나면 먼저 처가에 들러 인사를 드리곤 하는데, 과거의 사회적 기억이 현재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결과일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부부가 식사를 하는 모습(중국 지안 소재 각저총 묘주부부도) (출처: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현북스, 2022, p.139)


고구려인이 결혼하는 또 다른 모습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혼인 관습이 있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다시 장가드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의 고국천왕이 죽자 그의 아내인 우 씨가 왕의 죽음을 숨기고 왕의 동생인 발기와 연우를 차례로 찾아가 왕위를 이을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발기와 연우 모두 왕이 죽은 사실을 몰랐지만 이를 이유로 우 씨의 제안을 거절한 발기와는 달리 연우는 우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 씨가 왕의 유언을 조작해 연우가 왕이 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산상왕이다. 산상왕은 형수인 우 씨를 왕후로 삼았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관습은 흉노를 비롯한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사회적 관습이었다. 고구려를 유목민족이라 하기 어렵기 때문에, 산상왕과 우 씨의 사례를 고구려의 일반적 관습이 아닌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일탈적 상황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언어 및 여러 가지 일이 대체로 같았다고 하는 부여에서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속이 있었고, 양서고구려전에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형사취수혼또한 고구려의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만나는 지름길

  서옥제형사취수혼을 각각 피지배층과 지배층에서 별개로 작동했던 혼인 형태로 구분해서 이해하려는 연구자도 있지만, ‘형사취수혼의 경우 엄밀히 말하면 여성측의 재혼이라는 점에서 서옥제와 함께 행해진 혼인 형태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과거에는 형사취수혼수혼(獸婚)’, 즉 짐승이나 하는 혼인 형태라 해 비정상적인 예외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형사취수혼은 유목민족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기능 때문에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혼인 관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혼인에 현재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난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조건이 달랐던 과거를 현대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대표적인 오류일 뿐이다. 과거를 살아낸 우리 조상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은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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