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청아출판사, 2023)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소련을 포함한 러시아, 중국, 조선왕조, 북한, 한국의 역사를 비롯해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사에 밝으면서 이 일련의 주제들에 관해 개척적 저술들을 출판해온 역사학계의 권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특히 일본에서 흔히 ‘조선전쟁’이라고 부르는 6·25전쟁에 관해 선구적 저서들을 출판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조선전쟁 전사』(도쿄: 이와나미쇼텐, 2002)가 한국에서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남상구·조윤수 옮김, 청아출판사, 2023)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이 책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6·25전쟁에 관한 와다 교수의 연구 축적
와다 교수는 12세로 중학교 1년생이던 1950년 6월 25일에 ‘이웃 국가에서 일어난’ 이 전쟁에 접하면서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은 소련의 북한 점령정책으로 시작돼 『소련의 조선정책, 1945년 8월~10월』(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 제33권 제4호 1981년 11월 및 제33권 제6호 1982년 3월)으로 나타났으며, 곧 김일성에 기울어져 『김일성
과 만주항일전쟁』(도쿄: 헤이본샤[平凡社], 1992: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으로, 그리고 『북조선: 유격대국가의 현재』(도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98: 서동만·남기정 옮김),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돌베개, 2002)로 이어졌다.
이러한 기초적 연구와 저술에 바탕을 두고, 그는 ‘조선전쟁’에 관한 국내외 거의 모든 저술들을 섭렵하고 특히 러시아와 중국에서 발굴된 자료들을 분석한 뒤, 1990~1993년에 일련의 논문을 『사상(思想)』에 발표했으며 이 논문들을 엮어 1995년 이와나미쇼텐에서 『조선전쟁』으로 펴냈다. 와다 교수는 이 책의 집필을 끝낸 직후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4년 6월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넘긴 이 전쟁에 관한 옛 소련의 기밀문서들에 접했으며 그래서 책을 출판하기 직전에, 원래의 논지를 유지한 채 말미에 「보설(補說): 러시아 새 자료에 대한 검토」를 추가해 이 책을 출판했다.
와다 교수의 연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옐친에 의한 옛 소련 기밀문서 공개를 계기로 러시아의 여기저기서 공개됐거나 발굴된 새 기밀문서들을 모두 활용해 전쟁의 계획으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전모를 다시 써서 2002년에 같은 제목 아래 이와나미쇼텐에서 개정판을 출판했으며, 그 이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들을 보강해 개정증보판을 출판했다. 이 개정증보판을 미국의 역사학자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New York: Rowman and Littlefi eld, 2014)로 번역·출판했다.
이 책의 학문적 기여
그러면 『조선전쟁 전사』의 학문적 기여는 무엇일까?
첫째,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전쟁에 관한 일본에서의 연구는 물론이고 미국·영국·러시아·중국·한국 등 관련국들에서의 자료와 저술을 연대기적으로 상세히 지적하고 그것들의 장·단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머리말」만 읽어도, 연구자들은 이 주제에 관한 학문적 논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바뀌어왔는가를 쉽게 이해하게 되며 각자의 연구방향 설정에 단서를 잡음에 있어서 도움을 받게 된다. 여기서 중요하게 상기돼야 할 점은 저자가 영어와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와 러시아에도 밝아 중국 자료와 러시아 자료를 광범위하게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자료들에 친숙하지 않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둘째, 저자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도 성공했다. 예컨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재발행을 허용한 『해방일보』와 『민주조선』을 찾아내, 피난하지 못해 사실상 ‘포로’가 된 한국의 몇몇 정치지도자들이 한국과 미국을 비난하고 북한에 동조한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들을 분석할 수 있었다. 저자는 그러한 발언이 과연 그들 본인의 뜻인지 의심스럽다고 논평하면서, 그들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전쟁 상황은 냉혹했다. 김규식 · 조소앙 · 안재홍 등은 그러한 발언을 하고도 ‘납북’을 피할 수 없었다.
셋째, 저자는 새로운 해석도 제시했다. 하나의 작은 사례는 이 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대표가 불참한 원인을 스탈린의 결정에서 찾은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이 늘 경계하는 미국을 이 전쟁에 묶어놓음으로써 국력을 소진하게 하려는 계산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파병을 승인하게 될 안전보장이사회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대표를 불참시켰다는 것이다.
넷째, 저자는 이 주제에 관한 연구에 학문적 신중성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그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뒤 자신의 기존 해석을 보완하곤 했다. 앞에서 언급한 「보설」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또 새로운 자료에 접한 뒤 자신의 기존 논점을 수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코리아를 미국의 극동방위선 안에 포함시키지 않은 딘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의 1950년 1월 전국미국신문협회에서의 연설이 스탈린과 김일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남한을 침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해석에 동의했던 그는 이 해석을 버리고 그들은 이 해석과 무관하게 미국의 불개입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것은 그의 학문적 진지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다섯째, 저자는 이 전쟁이 ‘소련의 지지와 원조를 등에 업은 북한의 공격으로’ 시작됐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1945년 8월 15일의 남북분단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 남에서 대
한민국이 세워지고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데 이어 남과 북 모두가 무력으로 자신의 주도 아래 통일국가를 세우려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이 전쟁은 내전에서 출발했으나 국제전으로 확대됐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여기서 토론하고자 하는 논점은 저자가 이 전쟁이 미·소·중·일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의 역사적 맥락 그리고 근현대 이후 전개된 조선 = 한민족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미루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 서평자는 의견을 달리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역사적 불가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쉽게말해, 이 전쟁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고, 이렇게 볼 때, 전쟁을 시작하자고 몇 해에 걸쳐 스탈린에게 졸라댄 끝에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낸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여섯째, 저자는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이 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정의했다. 윌리엄 스툭(William Whitney Stueck, Jr.) 교수는 자신의 1995년도 저서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에서 이 전쟁을 ‘제 3 차 세계대전의 대체(a substitute for World War Ⅱ)’라고 불렀다. 비슷한 맥락에서, 와다 교수는 1996년에 릿쿄대학(立敎大學)의 한 논문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 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서의 조선전쟁’으로 명명했다. 청일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서의 제 1 차 조선전쟁’으로 보았고, 러일전쟁을 ‘동북아시아전쟁으로서의 제 2차 조선전쟁’으로 보았으며, 1950~1953년의 조선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서의 제3차 조선전쟁’으로 본 것이다.
일곱째, 어느 무엇보다도 저자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점과 관련해, 이 전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게 기여한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교수는 와다 교수의
책은 “지금까지 출판된 한국전쟁의 역사 서적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단행본”이라고 호평했다.
여덟째, 이 책은 ‘조선전쟁 전사(全史)’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전쟁의 뿌리와 원인과 전개 및 정전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재미있게 설명했으며, 정전 이후 7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조선 = 한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이 점과 관련해,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남북한 국민이 3년간의 전쟁을 과거의 일로 흘려보내고 평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려면, 쌍방 모두 무력으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에 발을 담갔다는 공통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또 그러한 전쟁을 함께 반성하고 서로에게 사죄할 필요가 있다. 이 전쟁에 대한 공통인식이 없는 한, 나아가 반성과 사죄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한민족은 공존과 평화를 향해 도약할 수 없다”고 부연했다.
6 · 25전쟁은 우리 민족의 참극이었고 관련된 여러 나라에 큰 부담과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 이 고통을 덜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계속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사후 보장이 없는 외형만의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으로 치달리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전쟁에 대한 충분하면서도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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