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섬 풍경
조선시대 쓰시마가 교류의 상징이 되기까지
조선시대 쓰시마섬과 한반도와의 역사적인 관계를 이야기할 때 흔히 ‘통신사(通信使)의 왕래를 통한 평화적인 교류’ 혹은 그런 평화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던 지역을 이야기하곤 한다. 쓰시마섬을 방문해 본 사람은 이즈하라 곳곳에서 보이는 통신사 행렬 그림, 쓰시마박물관에 있는 통신사 관련 전시물, 그리고 매년 행해지는 지역 축제인 아리랑마쓰리까지 조선시대의 평화적 교류를 상징하는 것들을 가득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화적 교류가 조선시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교류는 이즈하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안내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쓰시마섬이 교류보다는 충돌과 갈등의 섬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기 쉽다. 충돌을 꼭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충돌과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평화적인 관계가 모색되고 교류가 활성화되는 긍적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교류의 상징 장소인 이즈하라 시기 이전의 쓰시마와 조선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선과 충돌이 반복되던 쓰시마, 충돌이 교류로 바뀌는 시기, 이즈하라로 관소가 옮기기 전까지 교류를 담당하던 장소까지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평화적 교류의 시작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쓰시마부산사무소 홈페이지 내 교통정보
쓰시마로 가는 길
다른 곳을 경유하지 않고 한국에서 쓰시마로 바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한다. 현재 출발 지점은 부산항인데, 쓰시마부산사무소에는 친절하게 지도로 교통로를 안내하고 있다. 쓰시마섬은 크게 ‘상대마(上對馬)’와 ‘하대마(下對馬)’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진다. 상대마에 있는 히타카쓰항까지는 1시간 10분 ~ 1시간 30분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이 소요된다. 반면 하대마에 있는 이즈하라항까지는 2시간 10분에서 2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히타카쓰로 가는 경로보다 1시간 정도가 더 걸리는 셈이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이 두 항구 모두 배가 운항하였으나 지금은 히타카쓰항만 선박 운항이 재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땠을까? 쓰시마섬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조선시대에도 이와 같은 경로가 이용되었을까? 위의 지도는 조선 전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포함된 쓰시마섬의 모습이다. 일단 지도에 나타난 쓰시마섬의 형태를 보았을 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 달라 생소하기까지 하다. 우선 쓰시마가 두 개의 섬이 아닌, 하나의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러일전쟁(1904 ~ 1905) 기간 중에 발틱함대를 상대하고자 아소만에 운하를 뚫어 쓰시마가 상·하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러일전쟁 전에는 쓰시마가 하나의 섬이었음을 이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쓰시마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남북으로 길죽쭉한 모습이 아니라, 동서로 구부러진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가장 활발하게 조선과 접촉하였던 곳이 아소만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아소만이 어떤 곳이었기에 지도에서 저렇게 부각시켰을까?
신숙주가 그린 『해동제국기』 중 일본국 쓰시마섬 지도
『해동제국기』에 삽입된 지도에서 흰색 실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당시 교통로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도착점 중 한 곳은 현재의 히타카쓰항도, 이즈하라항도 아닌 아소만 안의 포구다. 이 포구는 조선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여원연합군의 침입을 받은 이후 활성화된 왜구들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수많은 섬들이 만 안에 점점이 박혀 천혜의 자연 요새로 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세종 시기 이종무가 쓰시마섬을 정벌하러 갔을 당시 가장 먼저 진입한 장소도 바로 아소만이었다. 조선 전기 쓰시마로 가는 길의 종착점은 아소만이었다.
왜구의 근거지에서 교역의 근거지가 되다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근절을 위해 조선이 취한 온건정책 때문에 쓰시마는 조선의 교린정책 안으로 편입되었다. 조선 전기, 부산포를 포함하여 진해에 있었던 제포(내이포), 울산의 염포는 흔히 ‘삼포’로 불리던 곳으로 이곳에는 왜인들이 마을을 이루어 항시 거주하던 ‘항거왜인’, 상거래를 위해 왕래하던 ‘흥리왜인’, 사신의 임무를 띠고 왕래하였던 ‘사송왜인’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 ‘삼포’를출발지 겸 도착지로 삼아 쓰시마로 왕래하였다. 또 어업 활동을 위해 거제도를 경로로 이용한 대마도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섬 중 ‘고초도’에서 어업활동을 허가받았는데, 일종의 도항증명서였던 ‘문인(文引)’에 도장을 받기 위해 거제도에 들러야 했다. 그러니 거제도 또한 쓰시마로 왕래하는 기착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쓰시마에서의 종착점은 『해동제국기』에서도 보았듯이 아소만이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선박들에게 쓰시마는 도항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출입국을 관리하기 위해 세키쇼(關所)도 설치하였다. 특히 1443년 계해약조가 체결된 후에는 교역선에 대한 쓰시마의 권한이 더욱 증대되었다. 이 때문에 대마도주가 있는 중심도시인 사카(佐賀)는 번성한 교역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후나코시(小越船) 전경
고개로 배를 넘긴 ‘후나코시(越船)’, 출입국을 관리한 ‘바이린사(梅林寺)’
아소만에서 사카까지 배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쓰시마는 구릉으로 배를 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때문에 이곳에는 ‘배가 넘어간다’는 말 그대로 ‘선월(船越)’이라는 지명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고후나코시[小船越], 오후나코시[大船越] 두 곳이 그 흔적을 지명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중 고후나코시의 경우 고대에는 선박을 정박해두고 사람만 고개를 넘어갔는데, 15세기에는 바닥에 통나무 같은 것을 깔아 배를 실제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한편 1672년에 오후나코시에 운하가 생기면서 고후나코시는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갔다. 사실 고후나코시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당시 오사카에 이어 두 번째로 토벌할 목표 지역으로 삼았을 만큼 왜구의 근거지로 유명했는데, 성격이 바뀌어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이린사의 위치
한편 고후나코시를 지나는 모든 배들은 조선과의 통교를 허락하는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도항증명서의 발급기관은 바이린사(梅林寺)였다. 아소만 근처 미쓰시마 마치에 있는 이 자그마한 절은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538년 백제 성명왕 때에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을 가져와 건물을 짓고, 그 후에 절을 건립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사실 바이린사는 2012년과 2014년 한국인이 이 절에서 불상과 불교경전 등을 훔친 사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말 많고 탈 많은 바이린사가 조선 전기에는 교류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해동제국기』에 첨부된 지도에서도 보았듯이 한반도에서 아소만으로 들어가는 뱃길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교류의 창구를 마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 도항증명서를 발급하였던 바이린사
쓰시마의 중심지를 후추(府中)로 옮기다
1468년 대마도주 소 사다쿠니(宗貞國)는 중심지를 오 사카에서 후추(府中, 현 이즈하라)로 옮겼다. 하지만 이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통신사(通信使)의 파견이나 무역 활동 등이 이즈하라로 바로 집중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삼포왜란(1510)이나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이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임진전쟁(1592)까지 발발하면서 쓰시마는 잠시 얻게 된 ‘조선과의 교류 중심지’라는 타이틀을 잃게 되었다.
와니우라에 있는 한국전망대 간판과 사스나우라
전쟁이 끝난 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 회복 과정에서 쓰시마는 또 다시 중개자가 되었다. 1607년 회답겸쇄환사가 막부에 파견되었을 때 쓰시마는 도주가 기거하는 중심 지역인 후추(이즈하라)에서 외교업무를 관장하였다. 게다가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약정되면서 조선과의 통교전담자로 쓰시마가 확정되면서 조선과의 유일한 통교창구가 되었다.
출입국을 관리하는 세키쇼(關所)도 와니우라(鰐浦)에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한국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만큼 한국을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곳곳에 암초가 있고 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정박시키기에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672년, 만입되어 조금 더 안전한 포구가 갖추어진 사스나(佐須奈)로 세키쇼를 이전하였다.
이처럼 쓰시마의 중심지가 이즈하라로, 세키쇼가 사스나우라로 옮기면서 이 지역들이 조선과의 외교 중심지,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 후기 평화사절인 통신사의 왕래, 왜관을 통한 무역품들이 오가는 장소, 사절 왕래와 무역선을 수시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결국 교류는 충돌을 배경으로 이루어졌고, 충돌의 장소는 새로운 교류의 장소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쓰시마 또한 조선과의 충돌과 교류가 공존하는 섬, 충돌과 교류를 함께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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