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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문화를 수용해 만들어 낸 독특한 장례 전통, 고구려 고분벽화
  • 안정준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중국 내몽골자치구 중남부의 허린거얼현(和林格爾縣)에서 발견된 ‘허린거얼 신뎬쯔(和 林格爾 新店子) 1호묘’ 내에 그려진 ‘영성막부도’. 묘주가 생전에 관리로서 활동했던 장 면을 보여준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중남부의 허린거얼현(和林格爾縣)에서 발견된 ‘허린거얼 신뎬쯔(和林格爾 新店子) 1호묘’ 내에 그려진 

‘영성막부도’. 묘주가 생전에 관리로서 활동했던 장면을 보여준다.


벽화 무덤의 기원, 그리고 주변 지역으로의 전파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리는 전통은 언제, 어디서 유래했을까. 원래 무덤 속 벽화의 조영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 이래로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장례 전통이다. 벽화를 그린 이들은 죽은 이의 생전 모습과 생애, 그가 지향했던 이상향 등을 벽면에 그려 넣었고, 완성된 벽화를 일정 기간 동안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경하게 하기도 했다. 당시 무덤을 비롯한 장례 공간은 가족들이 죽은 이에 대한 도리를 하는 장소였으며, 정성을 들여 화려하게 꾸민 벽화는 그 집안의 효성과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후한 말인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원 지역에는 대규모 농민반란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연이어 국가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에 귀족들의 장례 문화도 점차 간소화되었고, 전쟁과 혼란을 피해 각지로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에 자연스럽게 중원 지역의 화려했던 벽화 제작도 점차 쇠락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3~4세기에 많은 중원의 이주민이 중국 동북방의 랴오양(遼陽), 북방의 내몽골, 하서지역인 간쑤(甘肅)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후한말~서진대의 고분벽화 전통은 그 지역에서 다시 새롭게 꽃피우게 된다.


강서구역 덕흥리벽화고분에 보이는 13군 태수 내조도. 묘주인 진과 휘하 관인들이 중 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강서구역 덕흥리벽화고분에 보이는 13군 태수 내조도. 묘주인 진과 휘하 관인들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무덤 속의 화려한 벽화, 고구려인을 사로 잡다

  한편 중국 동북 지역에서 유행했던 벽화 문화는 서서히 그 인근의 고구려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원래 산과 강의 자갈돌을 쌓아 돌무지무덤을 조영하는 것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였지만, 중국 왕조와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들도 점차 돌방을 만들고 그 내부에 벽화를 그리는 장례 전통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4세기 중반 이래로 중원 지역이 재차 혼란에 빠지면서 많은 중국계 이주민들이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고구려의 허용하에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정착하여 벽화가 그려진 무덤들을 다수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무덤이 황해남도 안악군의 안악3호분과 평안남도 강서구역의 덕흥리벽화고분이다. 당연히 이 무덤들은 그 구조와 벽화의 내용, 그려진 인물들의 의복 등에서 중국의 전통이 강하게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이들을 통해서도 이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벽화무덤의 축조 기술과 벽화 제작 기법 등을 받아들였고, 이를 점차 자신들의 장례 문화로 삼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에서 벽화무덤을 만들게 된 것은 후한 말 이후 중국 북방 및 동북방 지역과의 상호 교류와 유이민의 이주 등이 주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평안남도 중화 진파리1호분 현실에 그려진 백호(白虎) 그림

평안남도 중화 진파리1호분 현실에 그려진 백호(白虎) 그림

    

외부 문화를 자기 스타일로 재창조하다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했고,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권국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5세기 중후반에 고구려에서는 많은 벽화 무덤들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으로 황해남도 안악군의 안악2호분, 평양 지역의 수산리벽화분과 쌍영총, 집안 지역의 장천1호분 등 수십 기가 발견된다. 이 시기 무덤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가 중국 북부 및 동북부, 더 나아가 내륙 아시아 초원지대로 이어지는 지역과의 동서교류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6세기 전반부터 고구려 무덤의 벽화는 점차 관념화되어 사방에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즉 이른바 사신도(四神圖)라고 불리는 소재를 그리는 형태로 변화한다. 중국에서도 남북조시기의 무덤 내에 일찍이 사신도를 그렸다. 그러나 이들은 사신도를 방위를 상징하거나, 혹은 무덤의 입구 쪽에서 의장 행렬을 인도하는 등 벽화의 주된 비중을 차지하는 소재로 쓰지는 않았다. 반면 고구려인들은 사신도를 무덤 전면에 크게 그려서 독자적인 소재로 채택했다. 이것은 아마도 고구려 사회 내의 오행설(五行說)에 입각한 사신 신앙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 사회의 신앙과 사상이 중국과는 달랐기에 자신들이 선호하는 소재에 집중한 독특한 벽화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리의 것이란?

  결국, 고구려의 벽화무덤 전통은 원래 외부로부터 들여온 것이었으나, 점차 자신들의 신앙과 사상, 취향 등을 접목시켜 독자적인 스타일로 재창조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평소 한국의 전통문화로 자랑하는 고려청자 역시 원래 중국 동남부를 통해 고려로 들어온 청자문화가 디자인과 색상면에서 독특하게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해 조금 넓은 시각으로 보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가 고대로부터 주변과의 부단한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던 사실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K-pop 신화를 이끈 아이돌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각국과의 문화 교류 속에서 형성된 한류(韓流) 문화가 재차 세계로 확산되는 지금, 우리는 유독 한국의 고대 역사만큼은 고립적’, ‘독자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의 것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우리 스스로 자각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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