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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역사
  •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2007요코이야기를 둘러싼 소동의 기억

 

2007116(미동부 시간), 보스턴 소재 한국영사관이 요코이야기에 대한 항의 편지를 메사추세츠 주 교육부에 보냈다. 시차 14시간 거리에 있는 한국에서 117일 저녁부터 비판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118일에는 조선일보에서 한겨레신문까지 전국지에서 일제히 대동소이한 비판을 실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비판의 핵심은 피난길에 오른 일본 여성을 위협하고 강간하는 가해자로서의 한국인에 대한 요코의 기억이 피해자로서의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당성을 저해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이었다. 그 비판의 밑에는 한국 민족=희생자 대 일본 민족=가해자라는 등식이 있다. 그러나 이 등식은 한국 민족이 일본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민족적 구도에서는 맞지만, 역사적 행위자인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한반도 내부의 가해자들과 일본 내부의 피해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틀렸다.

한나 아렌트가 전후 나치즘의 과거사 논쟁과 관련해서 집합적 유죄를 비판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개개인의 구체적인 행동과 그에 따르는 책임과 무관하게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로코스트의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으로 내몬 나치와 다를 바가 뭐냐는 것이다. 체제로서의 나치즘은 무너졌지만 나치즘의 사후에도 인종과 민족을 기준으로 개개인을 절대 범주화하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사유 방식은 버젓이 살아 있는 것이다.

요코이야기소동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논쟁의 불씨가 바다 건너 미국에서 지펴졌다는 점이다. 20069월 보스턴과 뉴욕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학제로 6학년 역사 과목의 리딩 리스트에 포함된 이 책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미국의 학생에게 식민주의의 희생자인 한국인이 폭력적 가해자로, 그리고 일본인이 무고한 피해자로 각인될 수 있다는 그들의 항의는 미국적 맥락에서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기억을 방패 삼아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맥락이 지워진 탈 역사화는 요코이야기의 가장 큰 약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몰아붙이는 관점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내러티브가 단순화와 탈역사화의 문제가 있다는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거짓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개념

 

태평양과 현해탄을 횡단하면서 벌어진 요코이야기소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라는 말을 썼다. 2007429일자 코리아 헤럴드에 실린 동아시아 역사문제에 대한 칼럼에서였다. 그러자 요코이야기소동의 진원지인 미국의 교포에게서 항의 이메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2007년 정초부터 봄까지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개념을 다듬을 수 있었다.

 

사진3_『요코이야기』 표지

『요코이야기』 표지

 

폴란드의 현대사/기억 논쟁을 줄곧 추적해 온 것도 도움이 됐다. 개념사적으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세습적 희생자의식에 빚을 졌다. 당대비평의 요청으로 200212월 리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폴란드 사회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치의 끔찍한 희생자였다는 기억이 가져다주는 도덕적 자기 정당화에 안주하지 않고, 유대인 이웃들이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고 있을 때 폴란드인 이웃이 보인 방관자적 태도에 대한 반성적 기억을 촉구한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한 상황을 겪은 희생자들에게 이러한 요구는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홀로코스트나 식민주의를 직접 겪지 않은 전후 세대까지도 자신을 희생자라고 간주하는 역사 문화 혹은 집단적 기억의 코드이다. 바우만은 이들 전후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자의식에서 구하고 그렇게 세습된 희생자적 위치가 이들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을 세습적 희생자의식이라 칭한다. 1968년 폴란드 공산당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의 목표가 되어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갔던 바우만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세습적 희생자의식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적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의 리즈대학으로 떠난 그는 나중에 근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이 문제에 천착했다.

 

 

누구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기 성찰

 

바우만의 표현을 빈다면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교훈은 어떻게 하면 다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시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전 지구적 근대성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는 누구라도 여건만 되면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우만의 세습적 희생자의식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의 젊은 군인들이 인티파타(민중봉기)에 나선 맨손의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에게 총을 겨누고 잔인하게 진압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국가가 필요하고 이스라엘을 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팔레스타인인이 겪는 비극과 희생은 얼마든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인티파타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을 일시 금지시킨 조치는 이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19435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우리는 인간답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외친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주동에서 시작되었다. 조잡한 사제 무기와 화염병, 맨손의 이 어린 전사들은 압도적인 화력의 나치 친위대에게 곧 진압되었지만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 저항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문제는 이 기념관을 방문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인티파타에 나선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이 게토 봉기의 유대 청소년들과 동일시되고 자신들은 그들을 진압했던 나치 친위대와 비슷하다는 연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참으로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사진2_나가사키 폭심에 위치한 우라카미 천추당의 옛 건물 잔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나가사키 폭심에 위치한 우라카미 천주당 옛 건물 잔해 

-이러한 메타포는 피해의 기억으로 가해의 원죄를 덮어씌운다.(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트랜스내셔널한 희생자의식기억문화

 

해방 직후 남북한 모두 다시는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 국민 모두 국가가 요청하는 근대화 프로젝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서야 한다고 독려한 동원 이데올로기의 밑바닥에도 이러한 역사적 희생자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역사적 희생자의식은 이스라엘에서 한국의 국가주의적 발전 모델인 강소국의 모범적 길을 찾으려는 오늘날 남한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에게도 잘 계승되고 있다. 일본 식민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북한의 역사의식에서도 희생자의식은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희생자의식이 지배적인 기억문화 혹은 역사문화가 폴란드나 이스라엘, 남북한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문호 개방 이래 자신들은 줄곧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희생자였다고 강조하는 일본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2차대전 이후 일본은 포스트콜로니얼 국가라고 자리매김된다. 서구=가해자 대 일본=피해자라는 구도 속에서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나 남양 군도 등에 대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억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원자폭탄,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 전쟁 포로, 피난민 등의 기억은 2차대전의 가해자인 나치 독일과 제국 일본의 희생자의식을 북돋우는 역사적 기제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최강대국 미국조차 자신을 9·11테러의 희생자로 간주할 정도이니 희생자의식의 규모는 생각보다 넓고 또 깊다.

되돌아보면 2차대전 직후 민족주의를 떠받치는 기억은 희생자의식보다는 영웅주의에 대한 기억이었다. 절대 악에 대항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거나 그 과정에서 쓰러져간 영웅들이 민족주의의 기억을 구성하는 질료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홀로코스트 희생자보다는 바르샤바의 게토 봉기 영웅들에 대한 기억이 더 중요했던 이스라엘이나 독립기념관에는 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림비를 세울 수 없다는 식으로 독립운동의 기억이 기세등등한 한국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기억의 지구화와 더불어 더 이상 영웅적 민족주의가 설 땅이 없어졌다. 전 지구적 기억 공간과 트랜스내셔널한 공공영역의 등장으로 약자, 희생자, 피억압 민족 등에 대한 공감과 동정의 여론이 확대되면서 민족적 영웅서사는 호소력과 매력을 잃어갔다.

 

 

사진4_샌프란시스코의 '위안부' 기림비

샌프란시스코의 '위안부' 기림비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얽혀있는 기억'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트랜스내셔널한 동아시아 기억을 구성했다.

 

 

그러자 민족주의는 영웅에서 희생자 중심으로 서사구조를 바꾸어 국경을 넘는 기억공간이라는 바뀐 환경에 적응했다. 홀로코스트가 코스모폴리탄적인 기억의 중심에 서면서 트랜스내셔널한 기억공간에 진입한 개개의 민족적 기억들은 그 희생의 정도에 따라 정당성을 인정받는듯했다. 1990년대 중반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참혹한 광경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다시피 하고 르완다의 인종 학살 또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과 가해자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는 트랜스내셔널한 기억공간에서 영웅주의에 기댄 민족주의는 어디에도 설 땅이 없었다. 민족주의가 가해자의 운율과 맞아떨어지는 영웅서사를 버리고 희생자의 서사를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탈냉전의 국제정치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고양에 큰 역할을 했다. 냉전체제가 만든 진영론의 구도 속에서는 희생자의 기억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배치되었다. 구 공산블록에서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연합국 폭격 전대의 무차별 폭격 등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부각된 반면에 카틴 숲의 학살 등 스탈린주의의 범죄나 소련 적군의 강간과 폭력에 대한 기억은 지워졌다. 반대로 서구에서는 나토 동맹국인 서독이 연루될 수밖에 없는 홀로코스트 대신 소련의 반유대주의, 스탈린주의의 범죄와 피난민들에 대한 소련 적군의 약탈과 강간 등에 대한 기억이 선별적으로 강조되었다. 연합국 폭격전대의 민간 시설을 목표로 한 전략폭격이나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폭력에 대한 기억은 건드리기 어려운 터부였다. 냉전체제의 붕괴는 이처럼 냉전의 속박에 묶여있던 희생자들의 기억을 놓아줌으로써 동서 양 진영에서 희생에 대한 기억은 봇물이 터졌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추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탈냉전시기 2차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스탈린 체제의 정치적 대학살 등에 대한 기억 문화가 어떻게 지구적 차원에서 서로를 참조하고 모방하면서 희생의 기억을 담보로 자신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가를 추적한 책이다. 현재까지는 한국어판과 일본어판만 출간되었는데 지방지까지 포함해 한·일 양국의 주요 언론에서 무게 있는 서평을 게재하여 책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일본의 산케이신문과 한국의 한겨레신문만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