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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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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정 120주년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이후 울릉도에서 불법 벌목이나 어업을 행하는 일이 극심해지자, 고종은 일본의 영토 도발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제정·반포하였다. 이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격상하여 울릉도, 죽도, 석도(오늘날의 독도)를 모두 관장하도록 하고, 행정 책임자인 울릉도 도감을 울도군 군수로 격상한다는 내용으로 관제를 개정한 것이다. 따라서 칙령 제41호는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유하고 있었음을 재확인한 중요한 사료가 된다.
역사포커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독도
120년 전인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제정·반포했다. 이 칙령의 제목은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이다. 그 제2조에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석도(石島)의 의미와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 간의 해석이 엇갈린다.
김병렬,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
독도박물관이 들려준 바다 이야기
독도는 예로부터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우리 고유의 영토이다.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강점당했으나 광복과 함께 되돌아온 주권 회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독도와 울릉도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국내 최초의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의 관장을 역임한 이승진 전 관장을 만나 지난 17년간 동해를 벗 삼아 살며 보고 느낀 것들,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와 영토주권, 디지털 아카이브로서 박물관의 미래 활용 가치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승진, 전 독도박물관 관장
역사인물
우용정의 울도기와 1900년 칙령 제41호
올해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를 제정한 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칙령 제41호는 울도군의 관할구역에 석도(石島) 즉 독도를 포함시켰으므로 독도 영유권을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사료이다. 그런데 칙령으로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에 내부(현재의 행정안전부) 관리의 보고서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논하지 않는다.
유미림, 한아문화연구소 소장
연구소 소식
자료로 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학술회의 개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이 증언을 계기로 많은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이 문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 정부와 군이 일본군‘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했다. 고노 담화를 계기로 일본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기술되었다. 그런데 2007년 3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각의 결정을 했다. 이 결정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초래했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EU 의회는 일본 정부에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 후세에게 교육할 것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2012년 12월 다시 집권한 아베 정권은 고노 담화 검증을 통해 이 담화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한·일 간 외교 교섭의 산물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켰다.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한일 정부의 합의 발표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제동원과 ‘성노예’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실렸던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술은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과 ‘성노예’ 사실을 부정하는 발언이 늘어나고 있다.
조윤수, 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재단 새 책
『발해유적의 국가별 발굴 성과와 재해석』
최근 재단은 『발해유적의 국가별 발굴 성과와 재해석』(연구총서 108)을 출간하였다. 이는 그동안 재단이 진행한 각국의 발해유적 발굴 성과를 톺아보고 재해석한 것으로, 이후 공동 조사와 보존의 방향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본다.
김은국, 재단 명예연구위원
해방 75년, 나는 왜 야스쿠니신사와 싸우는가
남영주의 진술서
남영주 원고의 오빠 남대현은 1923년 5월 20일생으로 1942년 육군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4년 8월 10일 뉴기니아에서 사망했다. 유족에 통보도 없이 1959년 4월 일방적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저는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오빠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빼달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이 법정에 섰습니다.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경에 일본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오빠는 8대 종손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를 이을 자식이라도 낳으라고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지만 얼마 되지 않아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마을에는 오빠 외에도 동원된 사람이 두 명 더 있어서 청년들을 환송하는 장행기가 마을 길을 뒤덮었습니다. 귀한 아들이 전쟁터에 끌려가니 어머니는 앓아눕고 집안은 온통 난리였습니다. 언니들과 저는 너무 무서워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어른들한테 혼이 날까 봐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 뒤에 오빠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는데 남양군도에 있다는 이야기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도 6·25전쟁 때 불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오빠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 한 장만 남아 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옛날에 살던 집 마루에 걸터앉아 손풍금을 치던 오빠 모습이 아련합니다.
정리 | 남상구,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시민사회
코리아협의회와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는 1990년 발족 이후 독일 시민을 대상으로 한국 관련 이슈를 독일 사회에 알리고, 독일·폴란드·한국·일본 등 다양한 국가의 청년들과 함께 과거사 극복을 위한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다. 2008년에는 산하에 일본군‘위안부’문제대책협의회(AG Trostfrauen)를 설립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유럽 순회 캠페인을 하며 독일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협의회는 ‘위안부’ 문제를 독일 사회에 알리기 위한 캠페인, 국제여성인권단체와 연대한 집회, 다양한 교육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했다. 1년에 한 번 피해 생존자들을 독일로 초청하여 순회 증언회 및 대중 강연, 기자회견 등을 열고 독일 정치인과의 만남을 주관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일본의 사과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꾸준히 열어 독일 여론을 환기하는 데 앞장섰다. 2019년 가을에는 ‘위안부’ 문제 및 전시 성폭력 상설 전시관 무언다언(無言多言)을 개관하여 「상처 – 그림으로 증언하는 한국과 필리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전시회 및 주변 학교와 협력하여 청소년 워크숍을 개최했다. 현재 이 전시관은 재단의 지원을 받아 청소년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개선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정유진, 코리아협의회 활동가
재단뉴스
재단 뉴스
재단은 중등 교원의 ‘동아시아사’에 대한 이해 도모와 교과 지도의 전문성 향상을 위하여 <2020년 동아시아사 교원 연수 기초 과정>을 개설하여 실시간 쌍방향 연수를 실시하였다. ‘동아시아사 교과목 이해하기’라는 주제로 기초 과정 1기(9.5, 9.12, 9.13, 15시간), 기초 과정 2기(9.19, 9.26, 9.27, 15시간)를 개설하여 총 60명의 교원이 연수를 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