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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침탈사로 본 동북아 도서영유권 분쟁
  • 제3연구실장 배진수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5월30일 동북아시대위원회와 공동으로 '동북아를보는눈:국가주의 보편주의'국제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이날 발표된 배진수 동북아역사재단 제3연구실장의 "동북아 영유권분쟁과 그 의미"논문을 요약해 싣는다.
- 편집자 주 -

북방4도서 : 러시아 - 일본

북방4도서라 함은 일본의 북해도(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캄차카반도를 잇는 쿠릴열도 20개 도서 중 최남단의 두 섬 에토로프와 쿠나시리 그리고 북해도 북쪽 근해의 두 섬, 하보마이와 시코탄을 말하는데 러시아에게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는 도서영유권 분쟁지역이다.
일본과 러시아간 최초의 국경협정이라고 할 수 있는 1855년의 러·일 화친조약 때부터 북방4도서는 일본영토로 확정되었으며, 20년 뒤인 1875년에는 러·일간 '쿠릴·사할린교환조약'(1969년 러시아군의 사할린 진입사건 계기)에서 당시 양국이 공동 관리하던 사할린을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일본은 쿠릴열도 전체지역으로 영유권을 확대하게 되었다. 이어 30년 뒤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러시아와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일본은 사할린 남부지역(북위 50도 이남)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러시아의 참전에 합의한 얄타협정(2.11)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조건으로서 러일전쟁 때(1905) 침해당한 러시아의 구영토인 남사할린의 반환과 쿠릴열도의 양도를 보장받게 되었고,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 러시아의 구영토(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원래 일본영토였던 쿠릴열도의 두 섬(에토로프, 쿠나시리)은 물론 쿠릴열도와는 별개인 하보마이군도와 시코탄섬 등 북방4개도서를 모두 차지하게 되어 양국 간 영토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쿠릴열도 중 두 섬에 관한 양측의 해석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즉,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상 일본의 영토 포기조항에 쿠릴열도가 명시되어 있는 만큼 당연히 러시아 영토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반해, 일본 측 주장은 여기서 말하는 쿠릴열도에 원래의 일본영토였던 두 섬(에토로프, 쿠나시리)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약상으로 보면 '쿠릴열도'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주장하는 상기 두 섬(에토로프, 쿠나시리)도 일본이 포기하여야 할 지역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안이 여러 차례 수정되는 과정에서는 이 두 섬을 포함한 북방4도서가 일본의 영토임을 명시하였던 적도 있었을 만큼 당시 조약 작성국이었던 미국과 영국도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만 최종안 작성과정에서 일본의 영토 포기지역만을 제시하는 식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결국 당사자간 영유권 분쟁의 불씨를 남기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센카쿠열도(조어도) : 일본 - 중국, 대만

센카쿠열도(일본명 尖閣列島; 중국명 釣魚島; 대만명 釣魚臺)는 5개의 작은 섬과 3개의 암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일본이 점거하고 있고, 중국 및 대만 측으로부터 영유권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가, 2차대전 이후인 1951년 9월 8일 대일강화조약 때 일본으로부터 미국에 이양되었으며, 이로부터 20년 뒤인 1971년 6월 17일 미·일간 오키나와 반환협정 때 미국관할로부터 일본영토로 다시 복귀하여 현재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중국과 대만으로부터 영유권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먼저 중국측(대만 포함) 주장의 논거를 보면,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1534년 중국이 처음 발견한 이래 중국의 고유영토로서 청일전쟁 당시 시모노세키 불평등조약에 의해 일본에 강제 할양되었으며, 2차대전 이후 제3자인 일본과 미국간에 불법이양과 복귀를 통해 현재 일본관할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측 주장은 이 지역이 청일전쟁 당시 강제할양된 것이 아니라 원래 무주지였던 것을 1895년 1월 14일 정식으로 일본이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조치한 것이며 미국과의 이양 및 복귀절차도 적법한 것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독도 : 한국 - 일본

독도문제 역시 출발점은 일제의 침략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 1904년 8월 22일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시작된 일제의 한국침략 와중인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소위 '도근현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우리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조치하게 되며, 이어 1905년 11월 7일에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을 거쳐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합병에 이르게 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독도 침탈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으나, 불과 몇 달 뒤인 5월경만 해도 일본 해군은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할 정도로 러시아 발틱함대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일본군은 9월 1일 울릉도 서쪽과 남쪽에 감시망루를 각각 설치하였고, 이어 9월 24일에는 일본군함 '니타카'호가 독도망루 설치를 위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로부터 5일 뒤인 1904년 9월 29일에 일본의 어업가인 나카이 요사부로가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당초 그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고 일본 정부를 통해 '독도 임대청원서'를 제출하려던 참이었으나 당시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쓰케 가네유키 등의 사주를 받아 결국 '독도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케 되었던 것이다. 1905년 1월 1일에는 일본군이 여순을 함락시킴에 따라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최종 결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 1월10일 내무대신(요시카와 아키마사)은 총리대신(가쓰라 다로)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 개최를 요청하였으며, 불과 2주일여 지난 1월 28일 일본 내각은 전격적으로 독도 편입을 결정하였고 뒤이어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침탈을 완료한 셈이다.
이상 논의한 바와 같이, 동북아 영유권 분쟁의 공통적 특징인 침탈의 과거사를 해당 역내 국가들이 진정으로 인정하고 회복시키는 노력을 할 때 공동의 선을 향한 궁극적인 해결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미국의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가 중요하다는 점 또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