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몇 년간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1712-1791년)의 '동사강목(東史綱目)'를 검토하면서, 잠시나마 역사 공부의 맛이랄까 재미를 느낀 파한(破閑)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동사강목'저술 당시 순암 선생은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들에 의문이 있으면 스승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년)에게 편지를 통해 질문했다.
두 선생의 문집에는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는데, 1760년 '동사강목'의 초고가 완성될 때까지 약 4 ~ 5년간의 편지가 대부분이다. 편지에서 밝힌 성호 선생의 견해가 '동사강목'에 많이 반영되어 있어, 편지는 '동사강목' 저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초자료가 된다. 이 점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 5백년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한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저술이기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공동 저작이라 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몇 권의 책을 썼지만, 책을 저술할 당시의 기초 자료를 남겨둔 것이 거의 없음을 이제야 부끄럽게 생각한다. 250년 전 '동사강목'저술 과정에서 순암 선생의 고민과 의문, 스승 성호 선생의 자상한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를 통해 필자는 바람직한 역사 연구와 참다운 사제(師弟)의 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기회를 가진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동북공정,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역사학
최근에는 성호 선생의 역사인식이 담긴 또 다른 자료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고 있다. 여기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선생은 "역사서는 모두 성패가 이미 결정된 후에 저술된다. 때문에 당시 훌륭한 계책이 실패하고 졸렬한 계책이 우연하게 들어맞거나, 선한 것에도 악한 것이 들어 있고 악한 것에도 선한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천년이 지난 뒤에는 어느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역사서가 저술된 당시의 성공과 실패의 상황을 잘 헤아려야 역사의 사실과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서에 드러난 내용만으로 생각하면 80 ~ 90%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권20 경사문(經史門) 좥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좦 에서).
선생의 지적은 마치 지금의 역사가가 250년 전 역사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꾸짖는 듯하다. 승자의 기록을 비판 없이 받아 적기는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당시 역사학의 폐단을 이같이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한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서가 사실 왜곡과 영웅 탄생의 상징 조작,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선전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선생의 우려는 지금 동아시아 역사 현장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은 한 세기 전 일제의 전철을 되밟아 제국주의 역사학의 낡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한국사 왜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불완전한 역사서를 금과옥조로 해서 자국의 국가 목표에 맞추어 역사 왜곡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다.
성호 선생이 그토록 불만스레 여겼던 승자의 입장이 강요된 '죽은 역사책'으로 다시 현재의 역사를 왜곡하여 죽이는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역사학이 바로 지금의 동북공정이다. 중국은 20세기 초 일제 식민사학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했던 식민주의와 팽창주의 역사학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에 대해 반문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성호 선생의 말대로라면, 오만한 승자의 역사학이요 80 ~ 90%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역사는 성패(成敗)가 아닌 시세(時勢)로 읽어야
선생의 얘기는 더 이어진다. "사람들은 늘 과거의 일로써 현재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 때문에 실수가 많다. 역사를 읽는 일은 마치 약제(藥劑)로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사람에 따라 병에도 차도가 있듯이, 모든 병을 같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다. 역사 역시 어느 일방의 입장이 아니라, 여러 역사서를 서로 비교하여 진실을 가려야 한다. 고금의 흥망은 시세(時勢)의 추세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반드시 사람의 재덕(才德)에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권27 經史門 좥진적논성패(陳迹論成敗)좦 에서).
성호 선생은 역사를 이해하는 요체는 개인이나 인간의 덕목이 아니라 시세를 정확하게 읽는 일이라고 했다. 선생이 말한 시세는 당시의 시대적 조건이나 상황, 현실적인 역학관계를 말한다. 성호 선생에 따르면 역사는 개인 즉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회조건, 국제적인 조건에 따라 변화 발전한다는 논리이다. 250년 전 역사가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혜안이다.
최근 중국 역사가들은 고려왕조의 건국자를 중국인의 후예로 보고, 고려왕조를 중국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한다. 당나라가 907년 멸망한 후 중국 대륙은 성호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아침에 왕조를 물려주었다가 저녁에 교체'(조선모체( 朝?暮遞 ))되는 '오대십국'의 혼란기이다. 이러한 대륙정세 속에서 동아시아의 패자를 꿈꾸면서 천자국을 자처한 고려왕조가 건국되어 거란국과 자웅을 다툰다.
당시 두 국가를 제외한 대륙의 왕조는 수명이 겨우 십 수 년에 지나지 않은 초로(草露)와 같은 왕조이다. 고려와 거란국은 그러한 왕조에게 '시세'상 현실적으로 두려운 강국이었다. 그들은 두 국가를 여전히 변방의 오랑캐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중화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자기도취에 불과할 뿐이다. 대륙의 이러한 객관적 시대조건을 외면한 채 단명(短命) 왕조 후당(後唐;922-936년)이 보낸, 중화주의의 망령이 배어있는 외교 문서의 한 구절을 가지고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의 하나인 고려왕조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객관적 역사조건인 '시세'를 분별하지 못하기는 현대의 중국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이다.
250년 전 조선의 역사가 성호 선생은 바로 오늘의 이런 희극적인 역사학을 이미 예견이나 하고, 역사 연구에서 '시세'를 강조했을까? 국가주의 팽창주의 역사학은 시세 즉 사회적 국제적 조건과 같은 객관적인 조건으로 역사를 읽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국가적 목표에 복무하는 시녀(侍女)역사학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