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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보고와 엔닌이 이어준 한·일의 오래된 인연
  • 전 주중대사관 총영사 유주열

9세기 일본 출신으로 중국의 불교 성지를 여행하며, 신라인 장보고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승려 엔닌의 일기를 통해 당시 활발했던 동아시아의 인적 물적 교류의 실상을 되짚어 보는 연재물을 3회(①③)에 걸쳐 싣습니다 _ 편집자주

지금부터 10년 전쯤 된다. 북경(北京)의 가을은 빨리 찾아왔다. 그 무렵 일본 근무를 마친 후라 일본어가 편하던 시절,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의 행사에 초대받았다. 그날 A라는 미국 부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 외교관의 부인으로 내가 한국외교관임을 알게 되자 장보고와 일본스님 엔닌(圓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두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던 관계로 더 이상 화제를 끌고 갈 수 없었다. 다만 엔닌이라는 일본스님이 중국 유학 때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언젠가 시간이 있으면 1000여 년 전 한·일간의 숨은 민간 교류의 내막을 찾아보아야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 후 장보고와 엔닌과의 관계는 까마득히 잊고 수 년을 보내던 나는 2001년 여름 일본 나고야의 한국총영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본 한·일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일본 학생들의 한국 수학여행마저도 중단되는 등 민간교류의 모든 채널마저도 거의 끊어져 있었다. 약간 서먹서먹해 있던 한일관계가 그 해 5월 취임한 고이즈미 전 일본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결정적으로 나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일 역사 좌담회, 무령왕을 다시 보다

한·일 역사좌담회를 통해 언제부터인가 알고 싶었던 장보고와 엔닌의 관계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특히 당시 발간된 최인호의 『해신』이라는 소설을 읽게 됨으로써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나는 엔닌이 귀국 후 주지스님으로 있던 일본 京都 인근의 히에잔 연력사를 방문하였다.
히에잔에 오르면 엔랴쿠지(延曆寺)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엔랴쿠지는 1200년 전에 일본의 사이초(最登)라는 스님이 창건한 절로 당시 국가적인 대사찰이었다. 이 절은 엔닌(圓仁)스님이 사이초의 제자로 중국으로 유학가기 전 수도했던 곳이다. 그 후 엔닌은 9년간의 우여곡절을 거쳐 중국유학에서 돌아와서 이 절에서 주지스님으로 있었고 입적한 후 일본천황으로부터 당시 최고 스님의 지위인 자각대사(慈覺大師)의 칭호를 받았던 곳이다.
엔랴쿠지에서 한 젊은 스님의 안내를 받았다. 그는 내가 한국 사람임을 크게 반가워하였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자각대사가 한국인 장보고의 도움으로 중국(당)에서 유학하고 무사히 귀국하여 엔랴쿠지를 오늘날 일본 최대의 절이 되도록 하였다고 설명한다.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청해진대사 장보고비"라는 높다란 비석이 한글로 새겨져있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신라 말기 반역을 하였다는 이유로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거의 말살되었고 일본에서는 신도(神道)에 의해 불교가 빛을 보지 못하자 엔닌의 행적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장보고와 엔닌의 관계는 완전히 묻혀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라이사워라는 미국인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엔랴쿠지의 젊은 스님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A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A부인 역시 미국인으로 라이사워 교수의 하버드대 제자라고 알려주었다. 10여 년 전 베이징 외교파티에서 만난 장보고와 엔닌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A부인도 이 곳에 수차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가벼운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라이사워 교수의 엔닌 연구는 결국 9세기 동아시아에서 해상왕 장보고라는 인물을 찾아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소설이며 드라마를 만들지 않았을까?

Ennin's Diary와 동방견문록

엔닌의 일기는 838년 일본 규슈, 지금의 하까다를 출발하여 남중국해를 건너 양조우(楊州)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양조우는 당시 중국과 무역하는 수많은 신라 상단이 있었던 곳으로 계원(桂苑)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의 기념관이 있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으므로 엔닌이 양조우를 다녀간 후 50년이 지나서 그곳에서 관리생활을 한 셈이 된다.
엔닌보다 450년 후에 양주에 도착한 마르코폴로는 양주에서 3년간 관리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마르코폴로의 양조우 기록은 너무나 간단하여 그의 3년간 체제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마르코폴로가 아버지 니콜로, 숙부 마페오와 함께 1271년 중국으로 가서 1295년에 돌아오게 되어 24년간을 중국에서 체류한 내용이 『동방견문록』이다. 마르코폴로는 귀국하여 조국 베네치아 군함사령관으로서 1298년 제네바와 벌인 해전에서 패배하여 전쟁포로로서 제네바 감옥에 갇힌 몸이 된다.
감옥에 갇힌 그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과거 중국여행을 구술하여 발간된 것이 『동방견문록』이다. 자신의 기록을 근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을 떠난 지도 수년이 지나서 기억도 생생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하여튼 그의 동방견문록은 제네바 출신의 콜럼버스가 항상 몸에 품고 다녀 후에 아메리카 발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전해져 콜럼버스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 한편 9년 이상 매일처럼 기록한 엔닌의 중국여행기는 라이사워 교수가 번역할 때까지 많은 사람이 모르는 잊혀진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된다.

(③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