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 재단에서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고대 한·일 교류와 상호인식"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고대사 연구자만으로 구성되어 한·일관계를 다룬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한·일관계 문제는 근대 100년사가 중심을 이루지만, 근원을 말하자면 고대사에 대한 이해 없이 근대 역사상을 제대로 밝혀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곡된 고대사상 재정립을 위한 사료적 검증
일본인의 한국관, 즉 근대 이후 일본에서 한국연구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이른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고대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8세기 천황제 율령국가 탄생으로 만들어진 일본 최초 정사(正史) 《일본서기》다. 천황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혈통의 신성성을 과시하면서 중국적 화이사상을 모방하여 한반도제국을 일본속국화 한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고대 신공황후라고 하는 가공의 여인상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한 인물이자 일본을 위기 속에서 구원한 수호신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근대에는 일본 최초의 화폐 모델로 등장했다. 화폐란 국가의 얼굴이고, 부의 상징이다. 그 도안으로 일본 대륙팽창의 선구자로서 자리매김된 신공황후의 이미지가 어울렸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소재였다. 임나 지배는 연구와 교육 현장에도 투영되어 고대의 왜곡된 한국사상이 근대 이후 일본인 머릿속에 새겨졌던 것이다. 고대 한·일관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렇듯 왜곡과 곡해, 정보 오인 등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일본측 문헌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한·일역사가들이 고대사 제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 교수가 발표한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와 일본서기"는 일본학계의 통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논고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후지와라 가문을 고대 일본 최고 명문가로 만든 인물이다. 오야마 교수는 후지와라노 후히토를 《일본서기》의 천황가 통치 이념, 서술체계를 구상한 설계자로 지목한다. 천황의 신격화, 천황가 만세일계의 논리를 만들고, 천상 세계인 다카마노하라(高天原)와 지상 천황과의 사이를 연결하는 천손강림이라는 신화를 창출하여 이 천황신화와 현실 천황을 중첩시키는 작업을 행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아스카시대 실질적인 집권자인 소가(蘇我) 왕권의 역사를 말살하고 천황가의 만세일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성덕태자라는 가공 인물을 창작하여 천황가에 의한 왕권 연속성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황가 만세일계는 근대일본 황국사관 논리이고 근대천황제 존립의 근간이기도 하다. 근대 지배 논리가 고대 이념을 투영시킨 것이다. 최근 일본 극우세력에서 보이는 일본중심의 독선적, 배타적 역사인식은 이러한 가공된 천황사관에 기초하고 있어, 우익사상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절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공동 역사인식 모색을 위한 학술회의 필요
도래인 문제를 다룬 발표도 여러 편 있었다.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왕도와 그 주변 지역인 기나이(畿內) 인구 3분의 1이 도래인이었다는 통계도 있듯이 이들 존재를 도외시하고는 일본고대사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종전 도래인에 대한 이해는 이른바 귀화인사관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일본고대국가 형성사에서 도래인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사토 마코토(佐藤信) 교수는 도래인들은 한반도, 대륙과의 외교, 행정문서 작성과 관리, 민중파악을 위한 명적(名籍) 관리 등을 담당하였고, 초기불교 전래, 토기, 철기, 직물제작 등 생산 업무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나아가 지방호족 세계에도 파고들어 한자문화와 선진기술 수용에도 영향을 주었고, 8세기 율령국가 관료조직 형성에 근간이 되었다. 즉 일본고대국가 형성사에서 도래인과 도래문화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고중세사 시대구분을 다룬 이노우에 쇼이치(井上章一) 교수는 일본근대사학사(日本近代史学史) 입장에서 논했다. 현재 일본사학계에서는 12세기를 기점으로 일본 고대와 중세를 구분한다.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고대 노예제사회가 존재했던 로마제국 멸망을 전후로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방법에 따라 고대일본 노예제 존재를 인정하는 전제이고, 동시에 중국에서 한제국 멸망을 전후로 한 고대와 중세 시대구분법과도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열기가 비등했던 근대일본 역사가는 일본열도 역사를 동아시아로부터 단절하고 열도 내부만으로 시대구분을 생각하였고, 일본만 유럽적이라고 간주하여 고대문화 수용루트도 유럽과 직접 연결시키는 역사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시대구분에 있어서도 일본근대사학이 만들어낸 고대사상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외에도 백제부흥전쟁, 일본고대 최대 내전인 임신의 난, 왜국의 불교수용문제, 임나일본부 관인의 성격, 대화개신 문제, 나라시대 백제계 씨족 문제, 발해와 일본의 교류와 상호인식 등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한·일 간의 학문적인 쟁점이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주제들이다. 종합토론 시간에는 한국, 일본이라는 국적을 떠나 연구자라는 동일한 입장에서 의견이 개진되었고, 공동의 이해에 도달하는 데에는 장애요인이 없었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한·일 간 역사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집단의 기초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함을 새삼 느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다양한 학문적 문제점들은 향후 양국 간 역사인식의 차이를 서로 이해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진실을 추구해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의 객관적 사실을 밝히는 문제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공동의 인식을 도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국가적 차원의 공동연구 뿐 아니라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자의 학문적 양심과 소신에 따라 대화한다면 현재 양국 역사갈등 문제들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