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한·일 국제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다행히 내게도 발표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후 재단의 배려로 10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 동안 익산, 부여, 공주의 백제 유적을 답사하였다. 35년만에 다시 찾은 한국의 발전상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를 생각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기 위해 떠났던 한국 여행
35년 전인 1976년 9월, 학생시절 지도교수였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님의 소개장을 손에 들고 제일 먼저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님을 찾았다. 교수님께서는 한국 여행을 하면서 고대사와 관련된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지식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셨다. 그 후 경주를 거쳐 부산에 가서 부산대학교 김정학 교수님을 만났다. 때마침 발굴 중이던 김해 유적 현장을 이틀 동안 안내해 주셨다. 그 후 경상남도의 옛 가야국 자리를 돌아보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찾은 해인사에서 수행 중인 젊은 승려가 그가 사용하는 자그마한 거처도 보여주고 해인사 경내를 안내해 주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백제유적지인 공주와 부여에서는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무령왕릉 견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영광이었다. 군산에서 페리를 타고 금강 하류를 건넜는데, 저녁 무렵 석양이 황해로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서-이곳이 백촌강(백강)전투가 벌어졌던 곳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지만-큰 감동을 받았다.
그 당시 한국을 여행했던 목적은 이러하다. 그 무렵에도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당시 도쿄대학 사카모토 타로(坂本太郞),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를 중심으로 《일본서기》 강독회가 있었는데, 마침 긴메이기(欽明紀)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문제가 거론되었다. 나는 신참이라 별로 발언할 기회가 없었지만,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라는 교수가 일제시대 이후의 식민사관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널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는 실제 현지를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서기》 속 역사왜곡의 진실
귀국 후 재차 《일본서기》를 정독하였다. 사실 한국 문헌에는 임나일본부 존재가 일체 등장하지 않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하여 작성된 것이며, 그 점에서는 한국 계통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복잡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진실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첫째, 《백제본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 망명한 백제인이 일본정부의 요구에 따라 제출한 것이다. 망명자 신분이기도 하고, 백 년 이상 지난 일이기도 해서 일본인 마음에 들도록 내용을 작성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스에마쓰 교수는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임나일본부를 야마토왕권이 한반도 남부에 보유했던 식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당시 야마토왕권의 국력은 해외에 영토를 보유할만한 수준이 아니며, 해군력도 매우 약체였기 때문에 식민지라는 식의 이해는 있을 수 없다. 대신 북규슈(北九州)와 세토내해(瀨戶內海)의 호족들이 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그 결과 가야에 왜국 출신자들이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이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임나란 당시 가야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은 다수의 소규모 국가 연합체로서 서쪽 백제나 동쪽 신라 같은 강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6세기 초반 동서 양쪽에서 침략을 받았는데,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에 병합되었고, 서쪽은 백제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야국이 현지 왜국 출신자를 끌어들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런 시대적 추세 속에서 현지 왜국 출신자가 멀리 야마토왕권에 원조를 청한 결과 야마토왕권도 이에 응했다는 것이 그 실상이다.
셋째, 그렇다면 가야에서 야마토왕권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였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실질적인 세력으로서는 매우 미미했다. 반면에 백제와 신라에 침략을 당해 위기에 직면한 가야국 입장에서 본다면 커다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현지 왜국 출신자만으로는 정치력이 거의 없지만, 그 배후에 야마토왕권이 있다면 백제나 신라 모두 정치적인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를 이와 같이 정독한 후 1980년에 〈소위 '임나일본부'의 성립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썼다. 긴 논문이었기 때문에 《고대문화》라는 잡지에 3회에 걸쳐 발표했다. 그 후 필자의 관심분야가 나가야왕(長屋王) 가문의 목간 연구에서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와 나가야왕으로 옮겨갔고, 다시 최근에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와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그리고 드디어 천황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가서게 되면서 사실 임나일본부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동북아역사재단에 재직 중인 연민수(延敏洙) 연구위원이 20년 전에 쓴 내 논문을 읽고, 과분한 평가를 하여 이번에 서울로 초청을 받은 것이다. 참으로 뜻하지 않았던 일이라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내 발표 제목은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일본서기》'였다. 일본 고대국가는 7세기 중반 이후 다아카개신(大化改新)과 임신변란(壬申變亂)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그런 이해는 《일본서기》에 의거한 것이다. 그 《일본서기》를 편찬한 최고책임자가 후지와라노 후히토였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세세하게 비판적으로 검증해 보면 후히토 등이 많은 사실을 왜곡하여 그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연구의 일부로서 1996년에 쇼토쿠태자라는 인물이 실은 실존하지 않는 가공 인물이었다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이상으로 다카마가하라(高天原)·천손강림(天孫降臨)·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화를 전제로 한 천황제도 사실은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이 《일본서기》 속에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아가 내 연구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다이카개신과 임신변란의 역사적 의의도 종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 일부를 연민수 연구위원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한다고 하니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