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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
  • 정병준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중국의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

발해사는 어떤 면에서 오랫동안 한국과 중국이 각자 자국사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상황이 평화롭게 지속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서로 상대방 견해를 부정하며 공격적으로 발해사를 해석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공방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이는 고구려사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다. 고구려사의 경우에는 중국 당국이 갑자기 자국사론을 내세우자 한국이 놀라 반격에 나선 데 비해, 발해사는 한국 연구자들이 중국 태도를 어느 정도 예상한 가운데, 오히려 동북공정을 계기로 그동안 못 다한 의견들을 한껏 개진하는 형세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서 연구 주제도 발해사 귀속문제만이 아니라 기초적 연구로까지 넓히고 있다.

번속이론과 발해사 연구

이러한 상황은 중국 당국이 고구려사를 넘어 백제사와 신라사에 대해서까지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하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번속이론(藩屬理論)'을 만들어 백제와 신라까지 중국사에 속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조공과 책봉, 칭신 등이지만, 이전에 비해 중국왕조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한층 구조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의미를 크게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해당 논자들 역시 자신들의 견해가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고구려사에 대한 주장을 더욱 확실하게 하려는 포석이 있을 것이다.

번속이론이 가진 큰 특징은 역사 귀속문제에 대한 근거를 지금의 중국 영토가 아니라, 예전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학계의 기본적 시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경우, 발해사에 대한 논의는 발해 영토의 많은 부분이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고 있다는 현실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번속이론으로 인해 한국학계가 백제와 신라 역사에 대해서까지 논쟁을 벌여야 할지 모르지만, 발해사가 중국의 역사적 논리를 역으로 공격하는 창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단지 발해사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한국 고대사 연구자 전체와 관련된 문제가 된다.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의 중요성

(그림1) 나라시대 좌대신으로 있던 나가야왕
(長屋王)의 저택지에서 '渤海使', '交易'이라고
쓰여진 목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27년의
발해사절이 평성경에 머무는 동안에 기록한
것으로, 발해와 일본이 교역했던 증거들이다.

발해사의 역사적 귀속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은 대외관계사에 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역사적 귀속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 즉 대외관계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동북공정'에서 추진한 발해사 연구의 완결적 성격을 지닌 웨이궈중(魏國忠) 등이 쓴 《발해국사》(渤海國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6)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철저하게 발해사 귀속문제를 의식하여 기술된 것인데, 귀속문제에 관한 견해는 사실상 발해 대외관계사 부분에서만 다루고 있으며, 나머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관한 기술에서는 대외관계사 부분에서 제시된 논리를 사이사이에 기계적으로 원용하여 적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발해 대외관계사는 앞으로도 한국과 중국학계에서 중요한 초점이 될 수밖에 없다.

발해는 인접한 많은 나라들과 각각 외교관계를 맺었다. 즉 당, 유목국가, 신라, 일본 등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조선시대 한치윤의 《해동역사》 권11, 발해 조 서문에서는 발해가 "서쪽으로 중국과 통하고, 남쪽으로 신라와 교빙하고, 북쪽으로 거란을 막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거의 300년 동안 동북의 오지를 지배하였다"라고도 지적하였다. 앞의 《발해국사》에서도 발해 귀속문제(대외관계사)를 논할 때, 이들 나라들과의 관계를 각각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들 관계는 서로 분절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작동되었다. 이런 점은 남쪽 신라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신라는 당과의 외교에 크게 의존하였던 반면, 발해는 당을 중시하면서도 일방적으로 당에 의존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발해 무왕의 등주 공격은 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발해 외교의 다양한 측면

《중국의 발해 대외관계사 연구》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관련 연구자들이 발해 대외관계사의 다양한 측면을 6인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연구의 일차적 목표는 앞의 《발해국사》 등에서 주장하는 중국 논리를 비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 주된 내용을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그림2) 정창원 소장의 신라의 대일 수출품인
숟가락, 당시의 포장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나는 발해가 당조의 번속국(藩屬國)이자 기미주(羈縻州)로써 평로군의 실질적 통할을 받았다는 내용에 대한 비판이다. 고구려와 발해 등의 귀속문제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번속국론(또는 속국론)과 지방정부론(또는 지방정권론)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발해국사》의 견해는 전형적인 지방정부론에 속한다. 하지만 《발해국사》 등을 검토한 결과, 실질적 지배를 나타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발해국사》에서는 '평로절도사 설평(薛平)이 입당(入唐)한 발해인들을 경사로 호송하였다'는 기록이 발해에 대한 평로군의 지배가 실질적이었음 나타내는 근거라고 말하는데, 이는 평로절도사가 자신의 경내에서 수행한 임무 중 하나일 뿐, 발해 자체를 관리하였다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다음은 일본 측 기록에서 발해를 조공국으로 취급하는 것을 언급하며 당에 대한 조공이 진짜이며, 일본에 대한 것은 일방적 기록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즉 《발해국사》에서는 발해가 일본에 굴복하여 번속하거나 조공을 바칠 하등 이유가 없으며, 시종일관 일본과 대등한 외교를 펼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발해가 일본으로부터 관작을 받지 않았고, 일본에 입시(入侍)하지 않았고,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이 발해국의 존엄성을 지키다가 자주 거절되거나 송환되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즉 중국 측 사서에 보이는 당과 발해의 종속적 관계는 그대로 인정하는 반면, 일본 사서에 보이는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기록 역시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기록에 내재된 자국중심적 시각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한·중·일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