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본 논문에 한국사 연구를 '실증연구 미성숙'이란 말로 평가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실상을 꼬집은 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주제만 보더라도 아직 다루지 않은 것들이 많고, 깊이 있게 실증하지 않은 연구가 적지 않다. 발표한 논문도 치밀한 검증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는 한국 자료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관련 자료를 함께 검토해야 하는 주제가 많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 역사학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동아시아 시각을 가져야 자국사도 제대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메이지유신 근원지를 다녀왔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하기 시와 야마구치, 그리고 시모노세키는 한국 근현대사 유적지이기도 하다.
곳곳에 날리는 메이지 유산의 깃발
메이지 유신은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경제면에서 '비서양 세계의 급속한 산업화'을 성취한 성과와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일본에선 메이지 시기를 부각시키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나가사키 항 선착장 매표소에 커다란 현수막을 붙여놓았다. 2015년 제39회 세계유산위원회의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 등록을 자축하는 현수막이다. 이 산업 유산은 용광로, 철광, 탄광, 조선소, 항만, 가마터, 철도 등 다양하다. 야마구치나가사키가고시마 등지에 산재한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유산들이다.
이 유산에는 색다른 유적도 들어갔다. 해군 유적과 방어요새에 있던 포대 등이다. 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1857년 문을 열어서 1년 남짓한 기간에 10대 학생들을 가르친 사설 학원이다. 그 학생 중에 막부를 타도한 선봉장들이 나오게 된다.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다. 이들이 정권을 장악해서 벌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후예들이 이어받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다.
일본 내 유적 중 하나라면 모르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것은 피해국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뿐 아니라 이웃나라에서도 명암이 명확하다. 군사 대국을 지향하여 침략 전쟁을 감행한 것은 어두운 면이다. 지금도 침략전쟁의 유산까지 자랑스럽다고 미화하고 있다.
일본 NHK 역사드라마는 영향이 대단하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가 일본 역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로 부각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015년에 또다시 메이지유신을 미화하는 '꽃 타오르다(花燃ゆ)'란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야마구치와 하기 곳곳에 남녀 주인공의 화사한 사진을 붙여놓았다. 역사 무대이면서 촬영장이 그곳이었다. 주인공 스기 후미(杉文)는 요시다 쇼인의 막내 여동생으로 오빠의 제자인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에게 시집을 갔다. 이 드라마는 산만한 줄거리로 시청률이 최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신과 원훈들의 공적을 자랑한 것은 여전하였다. 산업 유산으로 등록하든, 메이지 인물을 부각하든 치밀한 자료 조사와 실증연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인문과학에서도 대국인 일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의 대대적인 식민사관 재공습
메이지 유신 이후 군사력을 근대화하는데 성공한 일본제국은 본격적인 침략에 나선다. 첫 대상이 조선인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이른바 '밝은 메이지'의 중심에는 거족적인 침략 전쟁이 있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린 사람들은 정치 군인과 낭인 무리, 그리고 상인만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학문 방법으로 서술한 한국사 책에는 왜곡된 식민사학의 시각이 들어가게 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이어진 식민사학의 문제점은 한국 사학사에서 심각하게 다뤄온 주제였다. 20세기 후반기에는 그 잔재 청산에 관해 사회 전반에서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였다.
오늘날 식민사학의 문제는 사라졌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깔아놓은 인터넷망을 통해 대규모 공세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논문과 저서에서 부딪쳤기 때문에 연구자나 교육 현장이 전선이었다. 지금은 범람하는 인터넷 정보 때문에 단일한 전선이 없어졌다.
다국적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는 285개 언어로 나온다. 영어로는 5,080,998 항목이 올라있고, 다음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1백만 항목 이상 올라있다. 한국어는 현재 341,902 항목이라고 한다. 문제는 일본어로 된 한국사 관련 항목들이다.
그 항목의 내용은 놀랍다. 다양성이나 치밀함에서 한국어보다 훨씬 앞서 있다. 그 논조는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했던 식민사학 그대로다. 더구나 '성숙한 실증연구'의 형태를 갖춰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적지 않다. 전문 연구자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는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에게 줄 영향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일본 통치 시대의 조선'이란 항목을 예로 살펴보자. ① '조약'을 통한 조선 통치 ② 통감부 호적제도로 신분 해방 ③ 1906년 40개 미만인 학교가 1940년 1,000개 이상 확대 ④ 조선어 필수과목으로 문맹 퇴치 ⑤ 문화재 보호 ⑥ 철도 부설로 지방경제 활성화 ⑦ 도로 상하수도 전기 병원 공장 등 최신 시설 정비 등이다. 그래서 1910년 인구가 1,313만 명이었던 것이 1942년에는 2,553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근거로 각주를 무려 152개나 제시했다.
인터넷 정보는 국경이 없다. 영어를 비롯한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인이 이런 지식을 갖게 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최근 한일 관계 항목은 더 치명적이다. 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해 천황부터 역대 총리와 각료가 반복해서 사과했는데 한국인은 또 사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항목은 500개가 넘는 각주로 그런 '실증 연구'를 믿도록 한다.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 있는 일본 내 유적지는 야마구치 현에서 시작해 인터넷 공간의 일본어로 된 한국사 항목까지 넓어졌다. 관심을 갖고 꼭 답사해야 할 중요한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