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시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1796~1866)는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외과 의사가 되었다. 평소 지리와 외부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시볼트는 남미를 여행한 적이 있던 지리학자 훔볼트(A. von Humboldt,1767~1835)의 저서를 읽으며 먼 나라로의 여행을 꿈꾸었다. 특히 동양에 관심이 많았던 시볼트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서 182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였고,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있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포병연대의 육군병원 외과 장교로 근무하였다. 아시아 무역을 담당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파산하여 네덜란드 정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당시 네덜란드 총독부는 대일 무역의 교두보 마련을 위해 일본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했다.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당시 일본 정부는 나가사키 항에 있는 인공섬 데지마에 대외 무역 창구인 상관을 설치하였는데, 시볼트는 1823년 8월 12일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네덜란드 상관의 의료 업무를 담당하는 상관의로 일하게 되었다.
1826년 4월, 시볼트는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을 수행하여 에도(도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시볼트는 일본인 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 중 천문방(天文方)에서 일하고 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1785~1892)로부터 「대일본연해여지전도」, 「신정만국전도」, 「일본변계약도」 등의 지도를 얻었고, 시볼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러시아 탐험가 크루젠스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1770~1846)의 책 『세계일주』를 선물했다. 그러나 시볼트와 일본인 학자 간의 교제는 큰 사단을 초래했다. 즉, 1828년 9월 시볼트의 귀국길에 일본 지도가 발각됨에 따라 여러 명의 일본인 학자가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시볼트에게 지도를 주었던 다카하시는 옥사하고 말았다.
시볼트는 한국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한일 외교와 무역 업무를 관장하는 쿠라야시키(蔵屋敷)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시볼트는 그곳에서 전남 강진 출신의 선원과 상인 등 36명의 한국인 표류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시볼트는 그의 저서에서 “나는 전부터 일본인 지인에게 한국의 언어와 문자, 영토와 풍습 등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강진 사람들을 만나 그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를 해결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이들로부터 얻은 정보는 이 방면에 문외한인 유럽인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진술하였다. 강진에서 탈출한 하멜(Hendrick Hamel,1630~1692)이 『하멜 표류기(The Journal of Hendrick Hamel)』 를 발간한 지 180여 년 만에 일본에 표류한 강진 사람들이 독일인 시볼트에게 전한 한국에 관한 내용이 책으로 발간되어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1832년 시볼트는 일본 지리학자 다카하시의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1809)」를 모사하였는데, 이는 『Nippon』 시리즈 1권에 수록되었으며, 한국은 Korai 또는 Tsjo-sjon으로 표기되었다. 시볼트는 다카하시의 지도를 독일어 버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수역 경계에 ‘대한해협(Kanaal van Korai)’이라는 명칭을 추가하고, 당시 일본에서 인식되고 있던 울릉도와 독도(다케시마, 마쓰시마)를 그가 설정한 해협선에서 한반도 연안 쪽으로 표현하였다. 시볼트는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전도」를 제작하였는데, 이 지도에는 마한(Ma han), 변한(Pjon han) 등과 같은 고대 국가명도 표기되어 있다. 지도 상단 압록강이 한국어 의미에 따라 오리강(Ori Kang)으로 표기된 것도 흥미롭다.
이와 같은 지도 내용을 보면 시볼트가 한국의 언어와 역사도 깊이 있게 연구한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이 지도에서 주목할 점은 평안도 남서 연안에 표기된 독도(Tok to)의 명칭이다. 조선 후기 고지도에는 한자로 표기된 ‘석도’라는 명칭이 있으며, 현대 북한 지도집에도 동일 해상에 ‘석도’ 명칭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19세기 서구인이 조선의 지리 정보를 그들의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석도’를 ‘독도’로 옮겨 적은 사실은 오늘날 독도 영유권의 근거를 발굴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시볼트가 수집한 동아시아 지리 정보는 18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미국의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에게도 전해지는 등 시볼트의 동양에 대한 관심과 연구 활동은 동서양의 교류와 지도 제작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