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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임진왜란 직전의 통신사 외교 신경전의 살벌한 풍경
  •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통신사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통신사와 일본 측의 신경전

1590년의 통신사는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긴장된 분위기 속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6~1598)는 조선 국왕이 직접 일본에 와서 항복의 예를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쓰시마(對馬) 측에서는 이를 ‘새 국왕의 즉위를 축하해달라’는 요청으로 바꾸었다. 이후 일본 측은 조선의 연해를 침략한 왜구(倭寇) 두목을 잡아 보낸다거나,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통신사를 요청하기 위해 온 일본 사절의 태도는 꽤 고자세였다. 통일된 일본의 강력한 무력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러한 분위기는 조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통신사 일행의 입장은 조선 국왕의 국서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본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더라도 “오랑캐(즉, 일본)를 대우할 때는 법도를 가지고 해서는 안 되고 조용하게 처리하여 나라의 체면에 손상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라는 데 있었다. 일일이 의례를 따지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신사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이럴 때일수록 강경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가는 곳마다 일본 측과 신경전을 벌였다.


임진왜란 직전의 통신사 외교 신경전의 살벌한 풍경쓰시마 영주의 무례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김성일

일본으로 건너간 통신사 일행은 크게 두 가지 대응 방식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일본이 혹시 무례한 행위를 하더라도 문제 삼지 말고 넘어가자는 것, 다른 하나는 이를 분명히 지적하여 잘못된 점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특히 부사 김성일은 쓰시마에 머무를 때부터 의례적인 부분에서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쓰시마에서 통신사 일행은 고쿠분지(國分寺)라는 사찰에서 접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쓰시마의 영주이자 통신사의 일본 왕복 시 이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소 요시토시(宗義智,1568~1615)가 의아한 행동을 보였다. 고쿠분지의 접견 장소에 들어올 때, 가마에서 내리지 않은 채 문을 거쳐 대청에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김성일은 이에 항의하며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1536~미상) 에게 접견 거부를 요청했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마침내 김성일은 홀로 자리에서 물러나 숙소로 돌아왔다. 뒤이어 서장관(書狀官) 허성 (許筬,1548~1612)과 종사관(從事官) 차천로(車天輅,1556~1615)도 연회 자리를 떠났다. 김성일은 이전에 있었던 야외 연회에서도 소 요시토시가 말을 타고 사신단의 장막 앞까지 온 일이 있어 불쾌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임진왜란 직전의 통신사 외교 신경전의 살벌한 풍경곤장 맞은 통역관, 목이 잘린 가마꾼

김성일은 조선 통역관 진세운에게 곤장을 쳐서 항의의 뜻을 보였다. 다른 통신사 일행은 김성일의 조치가 심하다며 지적하였다. 하지만 김성일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통신사 책임자인 자신들은 일본말을 하지 못하므로, 역관은 의례상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쓰시마 측에 이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날 일은 예상치 못한 것이라 역관에 책임을 돌릴 수는 없으나, 김성일이 그 자리를 떴을 때 역관은 소 요시토시에게 그들의 잘못된 의례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병이 나서 돌아갔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므로 역관 진세운은 벌을 받아야 한다. 사신이 중국에 갈 때도 중국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조선 역관에게 곤장을 치는데 일본에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쓰시마 측도 깜짝 놀랐다. 이 소식이 그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전달되면 쓰시마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에 쓰시마 측이 취한 조치는 참으로 놀라웠다. ‘가마를 타고 문으로 들어가 대청까지 올라간 것은 가마꾼의 잘못’이라며 그를 처형한 것이었다. 김성일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소 요시토시 측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소 요시토시는 가마를 타고 들어갈 뜻이 없었다. 가마가 문으로 들어서자 가마꾼에게 멈추라고 하였는데도 가마꾼이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요시토시가 크게 화를 내며 그날 당장 목을 베어 죽이려 했으나 도망을 쳐서 처벌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잡아서 죽인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처형은 포구에서 이루어졌고 사신이 탄 배의 뱃사공을 입회시켜 증인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한 자는, 소 요시토시가 사신들에 대한 예의를 어긴 죄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가마꾼에게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일부러 뱃사공에게 처형 장면을 보도록 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후 소 요시토시는 통신사와의 접견 장소에 도보로 들어와 인사를 하였다. 김성일은 차천로에게 “사람을 죽게 한 변고가 우리가 연회장에서 먼저 나온 일에서 비롯되었으니 참혹하다. 사신과 나라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기는 했지만 이제 소 요시토시가 사과하고 아랫사람에게 죄를 돌려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나라의 체모가 조금 높아지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 씻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기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였다’ 라고 전해진다.


다른 일행들은 이러한 전개에 우려를 표하며 김성일을 책망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쓰시마 측의 ‘극단적’ 행동이 통신사 일행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통신사와 일본 수행원 측 사이의 긴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김성일은 의례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신사와의 접견을 일방적으로 미루는가 하면, 조선이 예상치 못한 황당한 접견 의례를 취하는 등 통신사를 당황케 했다. 그러나 인명의 희생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무고한 죽음을 발생시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